[반려인의 오후] 반짝이는 순간들이 모여 (2023)
2005년 전북 익산시 만경강 하구에서 물새 모니터링을 하던 시민운동가 동필씨는 도요새 10만 마리가 갯벌에서 쉬다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목격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하늘을 수놓은 은빛 날갯짓.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간척사업이 강행되면서 도요새의 아름다운 군무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끝나자 갯벌은 바로 말라갔다. 조개와 게들이 죽자 도요새들은 갑작스러운 기근으로 터전을 잃었다. 그 많던 새들이 사라진 갯벌은 텅 비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갯벌의 생태계가 위협받자 그 변화를 시민들이 나서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긴 세월을 황윤 감독이 다큐멘터리 〈수라〉로 다시 기록했다. 동필씨는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본 죗값을 치르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고양이와 함께 산 이래로 10여 년간 나는 다양한 감정을 새롭게 배웠다. 그중 하나가 죄책감이다. 생명을 책임진다는 일의 무게, 어떤 동물은 귀여워하고 어떤 동물은 맛있어하는 모순에서 오는 마음의 부대낌, 기후위기의 주범인 인간으로서 세상에 대해 느끼는 일말의 책임감,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떤 죄책감은 죄책감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돌보고 키우고 넓힌다. 이런 사실을 가르쳐준 것도 고양이다. 요다, 모래, 녹두는 차례로 내 인생에 들어와 때로는 물음표가, 때로는 느낌표가 되었다.
동물과 산다는 건 나와 나 아닌 존재 사이의 틈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일이다. 보호하고 양육하는 엄마 노릇을 한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대면하여 갈등 속에 살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러다 그들과 언어가 필요 없는 교감을 나눌 때면, 인간 세상이 규정해둔 많은 것들이 일순간 인위적이고 어색해진다. ‘동물’과 ‘사람’으로 존재를 구분짓고 분리하는 일도 그렇고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소유한다는 개념도 그렇다. 그들이나 나나 한 자리의 몫을 가진 지구의 거주자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이 실은 아주 허약한 관념과 게으른 관성에 기댄 것임을 깨닫는다.
지난 11월 막을 내린 권도연 작가의 개인전 〈반짝반짝〉은 도시의 야생동물들을 만나기 위해 어둠을 좇은 시간의 궤적을 담고 있다. 서울 올림픽대로 행주대교 남단 인근에는 습지와 작은 풀숲이 있어 많은 동물이 드나들 거처로 삼아왔다. 그런데 한강과 아라뱃길을 유람선으로 잇는 공사가 시작되자 강바닥이 파헤쳐지고 작은 숲은 며칠 만에 사라졌다. 사진 앞에 서면 인간이 만든 생태계의 변화 속에 도시의 여러 조각들이 깨어진 퍼즐처럼 함께 있는 게 보인다. 나무, 잡초, 고라니와 삵의 일시적 보금자리가 되었을 공터, 수달이 새끼를 돌보던 습지, 저만치 배경으로 선 아파트, 수많은 동물이 로드킬을 당하는 도로, 수십 년 전 역시 강바닥을 들어내 지은 다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듯 빛을 발하는 야생의 눈들까지. 그 눈들과 만나며 반짝이는 순간을 기록해온 작가는 썼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록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감탄일지 모른다”라고. 역설적으로 그 문장은 아름다운 것들이 점점 자리를 잃는 세상에서 기록으로 찰나를 붙드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한 이유를 말해준다.
나는 가끔 고양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양이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반려 가족이자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다. 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도 매일 가르쳐준다. 세상 모든 것이 잎맥처럼 연결돼 있음을, 더불어 사는 데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존재에 대한 경외와 감탄을 한번 경험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모순투성이 삶 속에서도 그 경험은 가치가 있다. 다른 존재에 대한 발견과 사랑이, 그 아주 작은 감동과 각성과 분투가 모여 우리의 삶을 ‘인간적’인 것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해주리라 믿는다.
- 시사인 반려인의 오후 연재, 2023년 12월, 8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