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의 오후]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2023)
나와 함께 사는 세 고양이의 이름은 나이 순서대로 요다, 모래, 녹두다. 이들은 모두 길에서 3월 내지 반년가량을 지내다 우리 집 식구가 된 뒤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 고양이들의 이름은 아마도 내가 집에서 가장 자주 입에 올리는 단어일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밥이나 간식을 줄 때도 부르고, 가르치거나 혼내야 할 때도 부르고, 칭찬하거나 예뻐할 때도 부른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불러볼 때도 있다.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보는 동물 가족의 작은 얼굴은 수천수만 번을 봐도 여전히 변함없는 감동을 준다. 자기를 부른다는 걸 알아듣기는 하겠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들의 귀에는 의미를 독해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에 불과할 몇 개 음절. 이따금 나는 그 낱말들을 혀 위에 가만히 굴려보며, 발음할수록 낯설어지는 이름이라는 언어의 묘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한다.
요다는 어릴 적부터 큼지막한 핑크빛 귀가 〈스타워즈〉의 요다 같았다. 녹두의 이름도 꽤 단순하게 지어졌다. 태풍이 다가오던 어느 밤, 동네 녹두삼계탕집 앞에서 어린 녹두를 처음 만났던 것이다. 모래가 왜 모래가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이름들은 별 이유 없이 정해지기도 하니까. 다만 모래가 우리 집에 오기 전 불렸던 이름은 아직도 생각난다. 어느 동물병원에 포획되어 중성화수술을 한 뒤, 모래는 한동안 그곳에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청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했다.
모래처럼 거처가 바뀌면서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이름을 여러 개 갖는 경우도 있다. 친구네 고양이 노랭이는 집 안과 집 밖 모두를 터전으로 삼는 자유로운 영혼의 고양이인데, 알고 보니 동네 사람들이 지어준 이름이 다 달랐다고 한다. 노랭이는 동네 초등학생 몇에게는 꽈배기, 어느 중학생에게는 감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름을 많이 가진 것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름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늘 영화 〈버드박스〉가 떠오른다. 괴현상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맬러리(샌드라 불럭)는 갓 태어난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몇 년간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맬러리는 아이들에게 쉽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보이’ ‘걸’이라고만 부른다. 고난 끝에 안전한 피난처에 도착한 뒤 맬러리가 처음으로 한 일은 비로소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그저 호명을 위한 일이 아니라, 소중한 존재를 승인함으로써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마음의 동아줄을 꼭 쥐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상에는 이름을 가진 존재보다 이름 없는 존재가 더 많다. 도축장에서 탈출하거나 농장에서 병들어 버려졌다가 살아남아 생추어리로 온 동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사로잡는 얼굴들〉을 보면, 사진 설명에 동물의 이름들이 적혀 있어 자못 감동적이다. 이제 이들은 가축이나 고기가 아닌 당나귀 쿼츠, 돼지 바이올렛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준다는 것은 계속해서 말을 걸기로 하겠다는 의미다. 그 관계 맺음을 지속해 나가겠노라는 약속이기도 하고, 살아 있는 모든 개체의 고유성을 다시 한번 되짚어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득 전에 없던 묵직함을 안고서 고양이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 시사인 반려인의 오후 연재, 2023년 6월, 81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