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가 말했다
: 우정수의 그림 ⟨시간과 방⟩(2015)에 부쳐 (2021)
원숭이가 말했다.
“우화의 한가운데서 살다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각기 하나의 방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네. 그 방들은 창문 하나 없이 고립된 공간이어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없는 것처럼 보여. 어둠 속에 있을 때 당신은 절망에 빠져 적을 상정하는 습관을 기르지. 과거에 한 발을 딛고, 또 한 발로는 미래로부터 뒷걸음질을 치는, 무모하고 괴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적을. 그러나 누가 누구를 위협하고 누가 누구로부터 도망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는 채로, 당신이 열쇠를 삼키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을 나는 보았다네. 현인들은 당신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답을 다 빼앗아갔어. 그러고는 아무것도 되돌려주지 않지. 가끔, 아주 가끔 당신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볼 때가 있어. 먼 조상의 이름처럼 단모음을 잔뜩 넣어 나를 부르는 것을 나는 어둠 속에서 들었지. 하지만 나에겐 주머니도 없고 모자도 없다네. 우화의 한가운데서 살다 보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 다른 무엇도 아닌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게 돼. 당신은 당신이 과거의 어느 날 동굴 벽에 정성껏 그려 넣은 그림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데 언제나 실패하지. 그리고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법을 이해하기 위해 거기서 건져 올린 이미지들을 난도질하곤 해. 무언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려는 노력에 비해 눈을 한 번 깜빡인 뒤 분노하거나 감동에 빠지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야. 정글에서 문명의 도시로 붙잡혀 온 고릴라가 자신을 묶은 사슬을 뜯어내면서 포효할 때 당신은 『공산당 선언』을 막 읽고 난 프롤레타리아의 얼굴을 보지 않나?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물고기 떼의 지느러미로부터 국경을 넘는 조각배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실향민의 몸짓을 보는 것처럼 말야. 당신은 그것을 인간만이 가진 최후의 자질이라고 착각하곤 하지. 그리고 어둠 속에 돋아난 보름달을 올려다봐. 놀라운 일이지. 그 안에는 당신이 줄거리를 상상해낼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이미 다 새겨져 있으니. 적과 동지가 하나인 전쟁, 사랑이 없는 사랑, 혁명을 폐기하는 혁명. 고개를 떨구는 순간, 쌓아 올리는 동시에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당신이 힘겹게 모아온 시간은 당신의 손안에서 우수수 흩어져버린다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손쉽고도 어리석은 일은 바로 시간과 사랑에 빠지는 일일 거야. 당신이 읽는 책들 또한 시간을 압축해 놓은 하나의 방이지. 책을 펼치면 네 귀퉁이와 네 모서리를 가진 평면의 공간이 눈앞에 나타나. 당신은 그 네모난 공간 속에서 일련의 흐름에 따라 누군가의 축적된 시간, 과거라는 발자국의 패턴을 읽는 거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때로는 언어와 문화에 따라 그 반대로. 하지만 이 세계는 불확정적인 세계야. 경계가 흐려지기도 하고 틀이 확장되기도 해. 멋진 일이지. 당신은 미주를 읽기 위해, 또는 색인을 찾아보기 위해 책의 맨 뒤를 자꾸만 열어보며 왔다 갔다 해. 어떤 경우에는 깔끔하게 조판된 문장 아래 연필로 밑줄을 죽죽 긋고 그 옆의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첨언을 하기도 해. 또 당신은 책장 위나 아래 귀퉁이를 접거나 알록달록한 반투명 포스트잇을 붙여, 내부의 어떤 순간으로 가로질러 가기 위한 푯말을 책장을 덮고도 볼 수 있게끔 만드는 일을 좋아하지. 하지만 가장 길을 잃기 쉬운 곳이 그곳이기도 하다는 걸 당신도 아마 모르지 않을 테지. 나는 당신이 그 방들, 그 공간들을 일말의 가능성으로, 감옥에 숨구멍을 내는 창문으로, 또는 얼어붙은 심장을 내리치는 도끼로 묘사하는 옛이야기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네. 그런데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나? 어느 날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서관과 박물관과 서점이 다 파괴되어버리는 걸세. 훗날 당신은 그 사건을 인류의 지성과 상상력이 허물어진 비극이라고 부르겠지만, 사실 소멸되는 것은 과거의 악행이라네. 죽음에 이른 것은 본디 언어와 숫자와 이미지로만 남는 법인데, 그 모든 폭력과 혼돈의 역사로부터 남겨진 기록과 함께 당신의 과거는 깨끗이 지워지는 거야. 당신에게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구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물론 ‘끝’이라는 것의 합당한 때와 자리를 이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이지. 생과 사는 물론이요 옳고 그름도 이성이나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곳이니까 말이야. 오랫동안 지켜봤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그런 사람들만이 가장 품위 없는 죽음을 맞더군. 빙하처럼 느리고 게으른 시간 속에서 영악하고 약삭빠른 자들만이 온전히 살아남는 걸세. 당신은 가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신은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관전하는 자니까. 짓궂은 비가 그치고 몸의 솜털이 마를 때쯤 비둘기는 멀리 날아가버리지. 우화의 한가운데서 살다 보면 비둘기가 작은 씨앗을 물고 돌아오기를 기대하겠지만 현명한 비둘기들은 난파된 배로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아. 보이나? 수세기 전에 다른 행성을 출발한 빛이 이곳에 도달하기까지,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당신을 닮은 이의 무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는 그것을 문명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부른다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아주 작은 감옥을 품 안에 하나씩 지니고 있어.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그 속에 스스로 들어가서 이불을 덮고 눕는다고. 어둠과의 공모 속에서 당신은 영원히 반복되는 실험에 가담하지. 당신은 꿈을 꿔. 홀로 살아남는 꿈을. 그리고 다음 순간 다른 꿈을 꾼다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는 꿈을.”
-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 51-5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