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하기, 되기 (2012)




최근에 나는 모 블로그의 자기소개 칸에다 이렇게 썼다.
: ‘글쓰기’라는 문제에 매달리는 명목상 미술가.
또 어딘가에는 아예 이렇게도 썼다.
: 글 쓰는 사람.
3년 전 미술대학 졸업작품으로 볼펜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을 때, 책의 서문 끝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작업의 한 축을 이루면서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것은, 쓴다는 행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세 개의 문장은 경쟁적으로 유치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어느 카테고리에 넣을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진술은 본디 유치한 법이다. 특히나 그 진술들이 서로를 어설프게 참조하고 있다면 모호함까지 추가된다. 나는 반성적으로 그 문장들을 곱씹기 시작한다. 이것이 여전히 범주화의 시도에 속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분명 나는 ‘이미지 생산’보다는 ‘언어 활용’ 쪽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과연 나는 미술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글 쓰는 사람인가? 글 쓰는 미술가인가? 미술도 가끔 하는 사이비 문학가인가?

대학물을 먹는 동안 이 전공 저 전공 전전하긴 했지만 어쨌든 최종적으로는 미술 고등교육 과정을 수료했고, 졸업 후 몇몇 전시에 이름을 올린 바 있으며 다원예술분야 공공기금을 지원받아 조만간 개인전도 치를 예정이니 공식적으로 나는 ‘미술가’, 낯 뜨거운 미술계 용어로는 소위 ‘영 아티스트’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형식상의 분류가 무색하게도, 누군가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막 통성명을 마친 상대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어떤 작업 하세요? 회화? 비디오?” 하고 말을 건네오면 그로부터 지난한 동문서답의 대화가 시작되고, 익숙한 반복 속에서 나는 결국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곡해하지 않고는 대화를 마무리 지을 수 없는 곤경에 처하곤 한다.

물론 이 곤경은 내가 기꺼이 자처한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텍스트를 주된 매체로 작업을 지속하는 한은 달가운 곤경일 것이다. 자기 작업의 논리를 확인해가는 탐구의 노정에서 성급하게 답을 내릴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게다가 크로체가 말했듯이 예술을 임의로 나누는 모든 이론은 근거가 불분명한 것이고, 나는 온전히 명명할 수 있는 장르의 개념이 어차피 낭만적인 허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니, 미술에서 글쓰기라는 작업을 어느 계보에 위치시킬 수 있을지를 고심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러한 글쓰기가 ‘어떠한 글쓰기’일 수 있을지를 물어야 하리라는 점이다.

실제로 나의 핵심을 뚫고 들어오는 것은 그런 질문이며, 진정한 곤경의 시간은 그 안에 있다. 특히 그 시간은 남들 앞에서 작업을 선보이거나 기획 의도를 설명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 작업을 대면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마주하고 있을 때, 글쓰기의 입구 혹은 출구 근처에 있을 때, 어떤 이미지와 말의 조각들이 고장 난 백열전구의 빛처럼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끝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때, 그럴 때. 모니터 여기저기 물음표가 떠오른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글쓰기를 통해 내가 시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미술에서 텍스트 지향이 유별난 것일 리 없다. 굳이 서양 개념미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현재 한국의 동년배 미술작가 중에서도 텍스트를 작업의 주요 매체로 다루면서 언어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온 이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다루는 방식으로 말과 글의 개념적 활용을 시도하는 여러 젊은 작가들이 매체로서의 텍스트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경향과 비교해 본다면, 나의 글쓰기는 상대적으로, 아니 명백히 비-개념적이다. 텍스트를 개념적인 장치로 사용하는 작업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은 어떤 ‘번역’의 과정이다. 그런데 나는 번역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번역에는 언제나 모종의 법칙과 체계, 그리고 그것을 따르면서 동시에 뛰어넘고자 하는 시도가 내재해 있게 마련이며, 나는 새로운 법칙을 고안하는 모든 작업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아마도 내 진짜 관심은 번역에 있다기보다 번안에 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국 민담 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어느 날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맞은 편에서 그 자식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맹세하라면 맹세도 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그 자식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 쪽에서도 역시 맹세하라면 맹세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사람의 입장에선 내가 바로 그 자식이었다. 우리는 서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정말 확신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자식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 역시 확신했다. 내가 바로 그 자식이라고. 우리는 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철석같이 확신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자식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철석같이 확신했다. 내가 바로 그 자식이라고. 우리가 서로 고작 몇 미터를 남겨두었을 때, 나는 완전히 확신했다. 그 사람이 바로 그 자식이라고. 그리고 그 사람 역시 완전히 확신했다. 내가 바로 그 자식이라고. 그런데 알겠는가? 우리가 나란히 섰을 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자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내가 생각하는 미술적 글쓰기의 일차적인 가능성은 ‘그 자식’과 같은 불투명한 단일 이미지가 구체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분화될 때 생긴다. ‘이야기’라는 표현을 쓰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다 이야기 아니냐”며 질색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 현상을 나는 신기한 역설로 받아들이는데, 이야기가 교육효과나 이미지의 스펙터클에 복무한 지 오래된 나머지 지금은 세상 모든 게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당연한 사실 자체가 무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문학평론가 김현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읽고 쓰는 행위를 가리켜 이 세계가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를 묻고 답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했다. 이런 인용은 현대미술을 의논하는 자리에서는 너무나 낡고 촌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술작품 역시 근본적으로는 고도로 축적된 일련의 질문이어야 한다.

물론 언어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함정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한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나는 아무래도 예술가 유형의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그이가 진지하게 받아치기를, 예술가는 맞는데 문학가형 예술가인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뭐냐고 되물었더니, 말과 글의 힘, 그걸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예술가 유형이란다. 그러고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는 말을 농담 삼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감스럽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인문학이 동시대 현실에 미치는 파장이 광고 카피보다 약화된 시대, 옐로 저널리즘과 블랙 저널리즘이 여유롭게 잇속을 나눠 먹는 시대에, 언어가 실제로 ‘말을 할 수 있다’고 믿다니. 제정신인가?

그러나 나는 (아직은) 제정신이다. 제정신이 아닌 것은 사실, (언제나) 언어 그 자체이다. 나는 문자언어가 모든 것을 서술할 수 있는 이상적인 채널이라는 믿음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토록 인간을 닮아 있는 병적인 특성 때문에, 언어가 늘 울며 겨자 먹기로 세상사에 관여한다고 보는 편이다. 작업에서 내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이고, 텍스트를 그 자체의 매혹으로서 다루는 데에 큰 관심이 없는 것 역시 그래서이다. 이야기의 회복은 텍스트가 아니라 컨텍스트와 관련되어 있다. 텍스트에서 컨텍스트로의 이행은 일종의 ‘이스트’ 효과와 흡사하다. 베갯머리에서 술자리에서 책갈피에서 웹상에서 전해지는 토막 난 세계관들은 수많은 출처로 나를 소환하고, 서로의 역사에 한없이 끼어들고 뒤섞이면서 그때마다 다른 조짐으로 부풀어 오른다.

한편,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사물과 인물과 사건이 아니라 사물과 인물과 사건에 얽힌 말들이라고. 소문과 대화의 작동 방식, 호명을 호명하기, 목록화, 목록화에 대한 의심, 그런 것들. 이런 의미에서라면 나 역시 기표와 기의 사이를 주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들에게 새로운 역사성을 입혀 다시 쓰는 일이 보편적인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 또한 내게는 중요한 질문이다. 물론 글쓰기는 결코 그 자체로 역사가 아니다. 사회학도 심리학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도 사회학도 심리학도 문화인류학도 이데올로기도, 모두 다 관여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예술이 예술 이외의 것을 끝없이 참조하고 지향하는 일종의 비예술적인 태도를 포함하지 않는 순간 지리멸렬해질 수밖에 없다고 믿으며,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의 개입은 그 지리멸렬함에 대한 저항에 도움을 준다.

물론 말해진 것의 내용만큼이나 말하는 양식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까뮈의 초기작 ‘행복한 죽음’에서 주인공은 독특한 말버릇을 구사하는데, “나는 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고 “나와 이 세계는 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 화법을 내면에서 일어나는 투쟁에 관한 작은 암시로 받아들여 보자. 우리는 그것을 글쓰기가 취해야 할 하나의 양식으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대상화된 세계를 바라보면서 무수한 타자들 속에서 나와 동일한 가치를 식별해 내는 안전한 방식을 버리고,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동일시하면서 내부의 균열과 갈등을 밝히는 선언의 한 양식으로 말이다. 더 나아가, 흑백논리와 근대적 자아의 세계를 물리치는 정신적 연대의 한 방식으로, 자기 몸에 기꺼이 흠집을 냄으로써 가려진 세계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상상력의 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 방식들이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가? 단지 말을 바꿔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말을 바꿔치고 나서 상실한 것과 얻은 것을 집요하게 재확인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러한 글쓰기가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적 글쓰기라는 것이 만약 일말의 가능성으로나마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언어와 이미지가 의식적으로 분열하며 대치하는 현장이거나 아니면 현실 언어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갈등과 의심의 한복판일 것이다. 갤러리 내부인지 외부인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사실 이제 현대미술은 ‘미술을 회의하는 미술’이라는 아방가르드적 자기규정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잠깐 시 얘기를 해 보자. 김혜순 시인은 시라는 게, 쓰는 것도 아니고 짓는 것도 아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존재하기나 사랑하기와 마찬가지로, 시 하기를 통해서 시는 행해진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이 그랬듯이 쓴다는 행위의 처소를 머리나 심장에서 몸으로, 존재의 온몸으로 옮긴다. 즉, 확장한다. 어떻게 보면 미술 역시 이미 꽤 오래전에 미술’하기’를 택한 것 같다. 미술에서 수행성이라는 개념의 유행은 미술이 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뭔가 ‘하기’를 통해 아예 ‘되어버리기’를 꿈꾼 데서 자연스럽게 시작한 것일 터이다. 그 변용의 과정에서 새로운 회의의 가능성이 발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오해의 소지도 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동시대 현대미술의 감각에 따르자면, 모든 것이-미술적 글쓰기 또한- 일종의 우발적 사건으로서만, 퍼포먼스적 상황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강요되는 것을 느낀다. 나는 심지어, 수행적 글쓰기에 관해 써 달라는 기획자의 청탁에, 그것에 관해 쓰는 방식으로는 응답할 수 없고 그것을 행하는 방식으로만 답할 수 있으리라는 부담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과도한 망상이며, 화자인 자신을 소거함으로써 비로소 시인으로서 명확해질 수 있는 시’하기’의 아이러니를 왜곡된 방식으로만 닮은 것이었다.

요컨대, 시인들이 내비친 존재론적 사유가 지극한 은유의 차원에서 표현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가 글쓰기를 일컬어 ‘살인자의 대열로부터 뛰쳐나가는’ 행위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기보다는 거의 일생에 걸쳐 확장되고 재사유되는 세계관의 문제가 된다. 나는 우리가 글을 쓰고 읽는 행위가 어떠한 다른 지평에서 도움을 받더라도 여전히 매우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수행성이 글쓰기의 본래 의미를 압도하는 것을 경계하되, 오히려 세계에 질문을 제기하고 의식에 개입하는 태도의 차원에서 글쓰기가 적극적으로 수행적인 성격을 띠는 것을 반기고자 한다. 결국 글쓰기를 ‘하기’의 차원에 놓고 본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글쓰기가 이미지의 탈신비화를 시도’하는’ 것이며, 물신화되고 고착화된 인간 풍경에 균열을 가할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에서다.

그럼으로써 글쓰기는 무엇보다도 예술을 자신과의 토론이자 타인과의 토론인 대화의 자리에 돌려놓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나의 본성은 증오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안티고네는 말했다. 이것이 오늘의 글쓰기가 결탁해 있는 새로운 욕망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쓴, 그리고 앞으로 쓸 글들에 관해, 그들이 새로운 의미나 매력을 생산하지 못할까 봐, 혹은 미술적 정체성을 온전히 획득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내가 후회하거나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궁극적으로 사랑에 가담하는 데에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글쓰기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 『디 앤솔로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