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관동 표류기 – 유렁들과의 조우 (2012)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 십오 소년 표류기를 썼고, 십오 소년 표류기를 읽고 자란 나는 석관동에서 우왕좌왕 7년째 표류 중이다. 그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 석관동 표류기를 쓰더라도 결코 로빈슨 크루소 풍의 모험담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모험담의 주인공들은 위험천만한 환경에서 악당들을 일망타진하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아마도 우리 세대의 표류는 고향으로의 귀환을 목표로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연재는 그 간극 위에서 석관동을 더 많이 생각해 보고 더 구석구석 돌아보려는 시도다. 정밀한 스케치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몇 개의 질문에 가까울 이 첫 번째 글에서, 첫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석관동을 아십니까?”

석관동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의 동쪽에 위치한 동이다. 석관동의 이름을 풀이하면 돌곶이 마을이다. 유래가 제법 귀엽다. 마을 동쪽에 있는 천장산의 지맥이 까만 돌을 꼬치에 꿰어 놓은 것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심지어 석관동 초입에는 이 유래를 새긴 시커먼 돌덩이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기도 하다. 이 동네에 위치한 지하철역 이름도 돌곶이역이다. 나는 돌곶이라는 귀여운 이름이 역명으로나마 남아 있어 꽤 다행스럽게 여기곤 한다. 하지만 석관동 주민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역명이 하루라도 빨리 돌곶이역에서 석관역으로 바뀌기를 바란다고 한다. 이때의 주민들은 석관동에 땅을 가진 주민들로 국한된다. 지역구 의원 선거 때면, 석관역으로의 전철역 개명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후보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호응이 굉장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땅값에 관한 얘기니까, 나처럼 27만 원 월세살이도 버거운 주민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석관동에 처음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동네가 특이하다고 말한다. 명색이 대학교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는 동네지만 딱히 번화가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석관동의 한가운데에는 경종대왕과 그의 계비가 280여 년 전부터 누워 있는 의릉이 허허벌판처럼 펼쳐져 있다. 주택가로 들어서면 골목마다 점집이 숨어 있다. 과일을 팔면서 사진 인화도 해 주는 가게, 한쪽에선 양꼬치를 팔고 한쪽에선 담배를 파는 구멍가게처럼 두 가지 이상의 업종을 병행하는 가게도 종종 눈에 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변변찮은 소도시 외곽에서나 보던 풍경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동네도 꽤 변해서 내가 한예종에 입학했던 몇 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휑한 삼거리 가운데 빈대떡집 하나 덜렁 있던 캠퍼스 입구에는 이제 홍대 필이 나는 말끔한 인테리어의 까페도 몇 생겼다. 그러나 대학가 특유의 생기발랄하면서도 흥청망청한 분위기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다. 한쪽에서는 빠른 속도로 고층 아파트가 지어 올려지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 어깨를 겯고 나란히 엎드려 있는 낮은 고도의 건물들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이런 정황 중 일부는 동네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한예종 석관 캠퍼스는 구 안기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보안상의 이유로 당시 안기부는 주변 건축물에 3층 이하의 고도 제한을 두었다. 삼엄한 경비와 더불어 오랜 기간 지속된 건축물 고도 제한은 석관동을 강북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 중 하나로 만드는 데 톡톡히 일조했을 것이다. 지금도 석관동과 돌곶이역은 주변의 장위동이나 석계, 이문동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행길에 이 동네를 찾아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수 있다. 먼 곳에서 택시를 탔을 때 택시 기사에게 돌곶이역이나 석관동에 가자고 하면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옛날 안기부 건물 있는 곳요.” 하면 바로 알아듣는다. 사실 이 ‘구 안기부 건물’의 존재는 주변 건축물의 낮은 고도에 대한 설명 말고도 한예종과 석관동에 관해 많은 가십과 질문들을 던져준다. 몇 년 전, 나는 입학과 동시에 이 공간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들을 듣게 되었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과제들을 해결하느라,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에, 대부분의 시답잖은 소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그러나 개중에는 상당히 흥미진진한 것들도 끼어 있었다.

지하 깊은 곳 : 한예종은 의릉을 가운데 끼고 왼쪽으로 미술원, 오른쪽으로 영상원 건물을 두고 있다. 지금 미술원이 쓰는 건물은 안기부 대학원 건물이었고, 영상원은 신축 건물이 완공되기 전까지 중앙정보부 본건물을 개조해서 썼다. 이 건물이 원래는 지하 8층까지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지하 3층인가 4층인가에는 고문을 위한 수조도 남아 있었다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사실 이 건물은 지하 1층에서 내려가는 입구를 시멘트로 발라버려 출입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학교 직원들의 말을 빌려보면 가끔 공간을 넓히기 위해 벽을 부술 때 그 벽 뒤에 또 하나의 공간이 종종 발견되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복도를 혼자 걸을 때면 어디선가 희미하게 철벅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 그 건물은, 2007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건축무한육면각체 : 미술원 건물을 시인 이상이 건축했다는 헛소문도 있었다. 미술원 건물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운데 공간이 텅 비어 있고 사각형의 복도가 둘러싸고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런 구조의 특징은 처음 왔을 때 위치 감각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 시절, 잡혀 온 누군가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양팔을 붙들린 채, 더듬더듬 층계를 밟아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복도를 몇 바퀴 돌고 나면, 아마 입구도 출구도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건축한 김수근이 그랬듯이, 희대의 천재 시인이자 건축가였던 이상 역시, 자신의 작품이 많은 이들을 건축학적 미궁 속으로 빠트릴 거라곤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물론 흥미롭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건물을 이상이 건축했다는 가설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연표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진짜 건축가가 누구인지는 대중에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소문은 단순하게도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낳은 오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미술원 안팎을 떠도는 천재성의 신화가 이 건물에 걸맞은 건축가로 죽은 이상을 소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무덤들 : 1950년에 안기부가 서초동으로 옮겨가면서 한예종 측에 건물을 빌려준 이유는 대충 짐작 가능하다. 더 이상 쓸모없긴 해도 국가 보안 기관이었던 건물을 아무 데나 넘기기는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을 터에, 문광부 소속 특수 대학인 한예종 측에 생색내듯 양도하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식으로 처리한 것일 게다. 그런데 가끔 궁금해지곤 했다. 애초에 안기부 건물을 하필 이 터에 지은 이유는 뭐였을까? 천장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국가기밀을 다루는 기관이 들어오기에 보안상 최적의 지형 조건이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더 유력한 것은 풍수지리적 해석이었다. 말했다시피 한예종은 의릉을 끼고 있다. 왕의 무덤이야말로 풍수상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할 터. 박정희 정부 관리들이 군인들을 동원해 산을 깎고 땅을 다듬어 지금의 건물을 만든 것이다.
이상한 건 내가 이 ‘선택된 땅’에서 몇 해를 보내는 동안, 그들의 판단이 옳았던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허다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풍수지리적으로 훌륭한, 이른바 명당이라면 거주자가 땅속의 생기를 얻고 화를 피해 만사형통해야 하는 게 아닌가?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다. 일단, 이곳에 연못까지 파서 기생들과 연희를 즐겼다던 박정희는 결국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내가 한예종에서 만난 이들은 만사형통은커녕, 밤샘 작업을 거듭할수록 낯빛이 어두워지고 눈빛은 총기를 잃어가다 건강 문제로 휴학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경우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안타까운 죽음들에 관해서는 아예 말을 꺼내지도 말기로 하자. 살아남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풍수의 혜택을 입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다시 미술원 건물로 돌아가 보자. 아까는 이상한 사각 구조 얘길 했지만, 사실 내가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각형의 진짜 내부, ‘중앙정원’으로 불리는 가운데 공간이다. 그리 넓지 않은 정원에 수목이 빽빽하고 사벽이 둘러싸고 있어서일까? 얼치기 풍수의 영향일까? 이 정원의 나무들은 가지가 잘 흔들리지 않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안 부는 것도 아닌데, 괴상했다. 2008년 겨울에는 어디선가 토끼 한 마리가 나타나, 학생들이 이 정원에 풀어놓고 토끼를 키웠던 적이 있었다. 키웠다고 해야 할지, 방치했다고 해야 할지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이후에 토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몸이 비대해지고 히스테리컬한 행동을 보이다가 결국 죽었다. 지금도 미술원 중앙정원에 가면 그 토끼의 무덤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내 안에 석관동에 관한 희미한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도와주었다. 유령을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지만, 유령으로 가득한 공간에 살고 있다는 음침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사실은 나 스스로가 석관동을 부유하는 하나의 유령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명당은 아닐지 몰라도, 고립과 단절에는 최적화된 장소였던 것이다. 곧 다른 종류의 질문이 나타났다. 졸업을 하고 나서였다. 졸업 후에도 나는 석관동에 머무르기로 했는데,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사실 딱히 거처를 옮길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차츰 내가 먹고 자는 일 외에도 많은 것을 이곳에서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 지역에서 7년째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과 석관동이 도대체 어떻게 링크되어 있는지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내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우회해서 얻을 수는 없는 대답이었다. 그동안 공간의 이미지에 정신적으로 매몰되어 굉장히 자연스럽게, 그러나 수동적으로 이곳에 속해 있었던 나는, 이제 ‘학교 앞’이 아닌 ‘거주지역’으로서의 석관동을 천천히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또 하나의 질문이 얼굴을 내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역이란 대체 무엇인가? 라는, 조금은 딱딱한 질문 말이다. 얼룩진 창간을 앞두고 열린 회의에서도 이 질문은 중요한 화두로 다루어졌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의 고민 속에 던져져 있다. 얼룩진을 발행하는 돌곶이포럼은 ‘지역-예술-운동’이라는 키워드를 내걸고 있다. 세 개의 키워드는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예술대학 안팎에서 각기 다른 매체를 전공 삼은 이들이 모여 창작과 비평, 연대와 운동이라는 공동의 기획을 꿈꿀 때, 이때의 ‘운동’이 기성 운동의 한계를 답습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이때의 ‘예술’이 독자적 세계 안에서 이뤄지는 자기완결적 창작에 머무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역’이란 뭘까? 아니,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시장이 땅장사로 문화적 요충지들을 하나씩 잠식해 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여러 예술 장르가 저마다 지역을 말하고,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단어가 단지 지리적으로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는 지방을 가리키거나, 특정 도시 공간의 영역을 뜻하기 위해서만 호출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때로 지역이 실체 없는 목적지로 보였다. 그래서 관습화된 문화예술 테마의 한 종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지역이라는 말은 대안이라는 말 못지않게 손쉬운 정신적 도피처가 되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래전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회가 구성되는 최소 인원이 몇 명인가? 다시 말해, 몇 명이 있어야 사회가 가능한가? 어떤 사람은 셋 이상은 되어서 다수결이 가능해질 때라고 답하고, 어떤 사람은 두 사람이 있어서 타자의 존재가 성립할 때라고 답한다. 어쩌면 한 명으로 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지금 생각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요즘 나는, 질문 자체를 조금 비틀어 보고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 인원은 헤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굳이 수치로 환원된다면 그것은 인명 수가 아니라 차라리 온도로 계산되어야 할 것이다. 한 명이든 열 명이든,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의 본질이 규명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포착되는 움직임이 없다면 말이다.

나는 이 관점이 지역을 설명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역은 주거 공간의 집합이나 공간의 역사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땅값의 등고선과도 큰 관계가 없다. 지금 우리가 지역이라는 그림을 그릴 때는 결국 현재의 움직임들을 식별하는 시선의 상호작용이 그 재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열 감지 카메라가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신체 내부나 캄캄한 곳에서도 온도를 감지해 움직임을 포착하듯이, 사회 제도나 분류의 기준이 재단할 수 없는 시시한 움직임들도 식별되고, 인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주 정교하지는 않더라도 점점 뚜렷해지는 온도의 흐름과 동선이 드러날 때, 우리가 말하는 지역은 비로소 구체화될 수 있다. 소소한 그림 속에서 그 움직임은 굴뚝에 피어오르는 저녁밥 연기일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적극적인 그림 속에서는 수천수만 명이 한자리에서 켠 촛불의 흔들림, 분노의 외침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각자 발 딛고 서서 이름을 명명하려 애쓰는 지역들은 모두 그사이 몇 도인가의 온도로 유지된다. 요컨대, 움직임이야말로 사회를 구성하는 살과 피이며, 지역을 허구의 영역이 아니게끔 만드는 요체인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역은 물리적으로만 구획 지어지는 영역일 수가 없다. 한 점에서 다른 한 점까지, 움직임에서 또 다른 움직임까지, 먼 곳에 있는 잠재적 동료들의 심리적 영역까지, 지역은 확장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석관동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움직임으로 촘촘한 생활의 지도, 정치의 지도를 그려가고 있다. 비록 이곳은 풍수적으로 명당은 아닐지 몰라도 고립과 단절에는 최적화된 장소이기에, 역설적으로 무언가를 함께 공모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장소다. 을씨년스러운 기운에, 이름이 없이 방치되었던 공간들에, 스스로 새 이름을 붙이고 온기를 보태려는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동아리회관 지하 창고를 리모델링한 클럽 대공분실, 학생 자치활동을 위한 영감다방과 태평양홀, 그곳을 기반으로 한 한국예술펑크학교와 소모임들, 학교 안팎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책읽기 모임과 연대 활동, 얼룩진의 발간,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한 반대 여론을 위한 Anti Nuke Week in Dorgozi 행사, 그리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앞으로의 모든 사건이 이 지역을 그리는 지도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지도가 아름답게 정돈된 한 편의 풍경화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모든 기획의 전망이 낙관적으로만 여겨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개별의 사건들이 망하든 성공하든, 움직임의 신호가 커져 있는 동안에는 누군가가 여전히 석관동이라는 지역에 표류 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식별할 수 있고 그것에 가 닿을 수 있는 근거리에 표류 중이라는 뜻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혹은 ‘나날이 앞으로 전진’만이 청춘의 현명한 생존 전략인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이 중구난방의 표류 신호는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지금-여기’와 ‘나’를 잇는 연결 고리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결국 내가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 그 누구도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 즉 아직 이 현실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은 따로 떨어진 각자의 공간에서 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 각자의 절망을 곱씹는 상황이다. 좀비 영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좀비의 생김새와 위협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공포의 실체는 관계망이 소멸되고 인기척이 부재하는 황폐한 공간성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종말의 풍경에 가깝다는 사실을 우리의 몸이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희미한 신호를 보내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에서 표류 중인가? 나는 지금, 석관동이다. 오버.”




- 《얼룩진》 제1호(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