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하는 일 (2022)



편지로서의 책

어렸을 때, 책에 대한 나의 최초의 인식은 책이 곧 편지라는 사실이었다.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찾아오면 동네 지하상가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고르고, 표지 안쪽 면지에다 날짜와 함께 몇 줄의 편지를 써서 주는 것이 내가 처음으로 배운 선물 풍습이었다.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헌책방에 가면 입학, 결혼, 졸업, 실연, 취직, 입대 등을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과거의 마음들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지금은 대량복제된 저자 사인이 안쪽 면지를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그 자리는 선물하는 자의 페이지였던 것이다.

이제는 책 말고도 선물하기 좋은 물건이 많아졌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도 그 풍습을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책을 건네는 일이 내밀한 의미를 담은 말 걸기의 방편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참 좋더라. 이 책 한번 읽어봐.
예전에 이 작가 좋아한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간이 나왔네요.
네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샀어.
이 책 제목을 보니까 언니 생각이 났어요.

손글씨로 편지를 써넣지는 않더라도, 책을 선물하는 일은 어쨌든 마음을 쓰는 일이다. 일 대 일로 말을 건네는 일이다. 창작자와 수용자의 관계로 시선을 돌려보아도 그렇다. 나에겐 책이라는 사물이 대화의 감각을 가장 강하게 지닌 매체라는 믿음이 있다. 틀어놓기만 하면 떠먹여주는 영상 콘텐츠가 일상을 압도하는 시대에, 독서는 굳이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페이지의 앞뒤를 오가면서, 행간에 잠시 머물렀다가, 문장에 밑줄을 긋거나 책장 귀퉁이를 접고는, 검색창 또는 회상과 상상의 영역으로 훌쩍 다녀오기도 하면서, 독자는 자기만의 시공간에서 책의 세계와 주체적으로 만난다. 책은 끈기 있는 대화 상대 같다. 독자의 타임라인에 맞추어 말을 건네고,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질문에 응답한다. 그런 까닭에 독서는 혼자서 해도 외롭지가 않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면지에 저자 사인을 인쇄해 넣는 새로운 출판문화도 괴이하게만 느낄 일은 아닌 것 같다. 대량복제의 방식을 빌려서라도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이 책이 그저 활자와 이미지를 엮어 만든 산업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이야기임을 알아달라고. 몇 월 며칠에 이 책을 당신의 품으로 떠나보냈으니, 부디 잘 읽어주었으면 한다고. 그 마음을 굳이 수천 권의 책에다 새겨 넣고 싶어진 게 아닐까.

벽돌과 시멘트

2019년에 출판사를 운영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사업 마인드라고 할 만한 것을 거의 탑재하고 있지 않았다. 책을 팔면 세금계산서를 떼야 하는 줄도 몰랐고, 손익분기 계산하는 법도 몰랐다(솔직히 이건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내가 지출과 운영의 주체가 된다면 주먹구구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은 확실했다.

미술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첫 작업으로 책을 만들면서 자연스레 독립출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독립출판뿐만 아니라 어느 영역에 가도 제대로 된 체계나 계약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일이 흔했다. 문화예술 영역, 특히 “좋아서 하는 일”로 치부되곤 하는 창작 일에는 정확한 노무 관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있더라도 일회적 용역으로 고용된 관계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일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대우나 나쁜 일을 당해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래도 많은 것이 변했다. 미술, 영화, 만화, 출판 등 문화예술 분야별 표준계약서가 하나둘씩 만들어졌고, 국회에서 오랫동안 통과되지 못하고 있던 예술인권리보장법도 얼마 전 제정되었다. 나는 법과 규율이 많은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더 약한 위치에 있는 이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안전망은 필요한데, 그런 역할로서의 법은 늘 충분치가 않다.

한편, 계약 체계의 보완과 갱신이 꼭 불공정한 조건이나 갑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만 필요한 건 아니다. 예술 매체 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듯이, 출판물의 양식과 성격, 작업자의 협업 관계도 각양각색으로 달라지고 있다. 내가 출판사를 차리면서 꿈꾼 것은 사실 간단하다. ①서점에서 어느 매대에 올려놓아야 할지 단언하기 어려운 책을 ②안정적인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두 항의 양립은 모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성 출판 시장의 시스템과 법칙들, 그리고 이를 문서화한 결과물인 계약서는 변화의 흐름과 나의 바람에 대응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나는 제대로 된 계약서를 갖추기 위해 출판 분야 표준계약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대형 출판사의 계약서와 대조도 해보았다. ‘표준’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의미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법은 딱딱한 벽돌과 같아서 무작정 쌓아놓으면 빈틈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다. 보통의 경우 그 구멍들은 다시 관행이라는 이름의 허술한 시멘트로 메꾸게 된다. 하지만 대충 메꾸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공간에 알맞은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는 당분간 계약을 할 때마다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기로 했다. 만들 책의 성격, 역할에 따른 업무량, 예산의 출처, 협업의 조건이 매번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술과 출판의 경계에서 이런저런 이상한 책을 계속 펴낼 거라면, 그런 수고쯤이야 크게 성가신 일에 속하진 않을 것이다.

멀리 가기 위해

계약서는 딱딱하다. 얼핏 보기에는 지루한 법률 조항의 나열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이 문서를 두고 고심하는 일은, 독립출판이라는 낭만적인 낱말이 감추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책을 만드는 일이 누군가의 독보적인 재능이나 의지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 1인출판사든 대형 출판사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책이라는 사물이 타인에게로 건네져 읽힐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계약서를 만드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제작하는 동안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고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배려가필요한지를 다각도로 점검해 보는, 출판 과정에서 가장 잘 꿰어야 할 첫 단추다.

지난해와 올해 어떤출판연구회 인터뷰와 세미나를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그중 하나가 저자 외에 디자이너나 편집자 등 외주 작업자와도 인세 계약을 맺는 시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읻다 출판사 김현우 대표님의 표현을 빌자면 한 권의 책에는 작업한 사람 모두의 지분이 있다. 책이 오직 저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나선프레스 한범 씨의얘기에도 공감할 수 있었다. 출판사가 조금 손해를 감수하며 외주 작업자들에게 인세를 떼어 준다고 해도 지급되는 금액 자체는 소소할 테다. 하지만 책의 운명에 함께하는 이들 간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니 그 의미가 깊고 단단해 보여, 돛과닻도 앞으로의 계약에 참고삼기로 했다. 출판 일을 시작한 후로,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고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는 인디언 속담을 종종 떠올린다. 예전에는 뻔하게 들려 시큰둥했던 문구인데 요즘은 되뇔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새로운 계약을 할 때면 돛과닻 서류 폴더를 연다. 계약서를 다른 이름으로 저장한 뒤, 하나하나 수정하고 보완한다.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의 계약서에는 마감 일정, 저작권과 출판권에 관한 설명, 계약금과 인세 지불에 관한 안내, 쌍방이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에 대한 법률적 해석 등이 빼곡히 담겨 있다. 조항을 추가하고, 고치고, 또 추가해 본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튼튼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벽돌들을 쌓아올려 보는 중이지만, 아마도 계약서는 태생적으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틈을 포함하는 문서인가보다.

그래서 오늘은 별도로 짧은 편지글을 하나 만들었다. 미래의 어느 협업자에게 드릴 편지다. 계약서에 담지 못하는, 제안자의 손 내미는 마음을 적어봤다.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한 얘기들인데 굳이 한번 써봤다. 편지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책을 누구와 함께 만들고 싶은지, 무슨 마음으로 책을 만들고 있는지 거듭 확인해 보고 싶기도 했다. 다 쓰고 보니 쓸데없는 얘기가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이 버전을 그대로 드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삽질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히려 책 만드는 시간을 헛되지 않게 만들어줄 것을 믿는다.




- 『어떤 계약』, 어떤출판연구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