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앞에서
: 정희민의 《How Do We Get Lost in the Forest》 연작에 부쳐 (2022)
우리가 마주친 건 그녀가 작업실을 둘러싼 커다란 공원에서 키 큰 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가로지르며 산책을 할 때였습니다. 약한 비가 한 차례 내리다 그친 뒤여서 대기가 씻어낸 듯 맑았습니다. 산책로의 한쪽으로는 낮은 덤불이 자리해있고 여기저기 꽃들도 피어있었습니다. 접시꽃, 물망초, 제비꽃, 팬지, 찔레꽃, 호접란, 붓꽃…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매번 그 생생함과 연약함에 놀라곤 합니다. 그 속성이 바로 나에게 속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다 잠시 멈춰 꽃들을 유심히 바라봤습니다. 나는 조용히 뒤따라갔습니다. 카메라를 꺼내 여기저기 사진을 찍던 그녀는,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를 펴고 간단한 메모와 함께 스케치를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행동을 통해 유추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나를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에게 그런 것처럼, 그녀에게도 침묵은 생산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인 듯했습니다. 우리는 잠자코 앉아서 길고 느린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작업대 위에 여러 가지 물감과 걸쭉한 액체를 종류별로 펼쳐놓고 뚜껑을 딴 다음 그녀는 나이프를 휘저었습니다. 두 개의 손이 솜씨 있게 다양한 물질들을 개어 바르고 표면을 손질하는 동안 나는 캔버스 위에 팬지 한 송이가 서서히 모습을 나타내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녀가 잠시 허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을 틀었습니다. 스피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미지의 것을 알게 될까?
무엇이 우리를 연결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숲에서 길을 잃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뒤이어 깔리는 낮은 트럼펫 소리에 맞추어 조용히 춤을 추었습니다. 언제 어디에나 나타날 수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나의 장점이니, 휘젓고 다녀도 그녀의 작업을 방해할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그리는 인간을 구경하는 일에 익숙한 편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감각과 사유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불완전해서, 이를 돕기 위해 오래전부터 예술가라는 직종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나를 마당이나 집안에 들일 뿐 아니라 종이나 화면 위에 불러오는 것도 좋아합니다. 초기 인류에게는 속씨식물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나를 피워낸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나의 성공적인 번식과 진화의 역사가 너무나 당연하게 자연계의 일부로 받아들여진 이후로는, ‘아름다움’이라는 추상명사를 증거하는 데 오랜 세월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 관념과 내가 언제나 일치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기껏해야 대량생산으로 찍어낸 패턴 아니면 여성을 은유하는 언어의 감옥으로 활용된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인간이 나를 소환하는 방식이 급격히 달라진 것은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일입니다. 사람들의 생활에 무서운 속도로 스며든 과학기술이 문화와 예술에 접목되면서, 나는 한층 더 다양한 형태와 맥락으로 호출되곤 했습니다. 물론 복잡하게 작동하는 기술이나 상징 체계가 아니라, 순전히 진솔한 경외감에 의해 그려지는 그림들도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왔습니다. 내가 아는 한 그것은 현생인류가 타 존재에 대해 가지는 강렬한 감정 중에서 거의 아무런 대가를 돌려받을 수 없는 부류에 속하니까요. 어쨌거나 나를 향한 매혹이 어디선가 낮은 휘파람을 불 때마다, 끌리듯이 그곳으로 찾아가게 되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몇 주 후,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그녀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현관을 통과해 문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초대 받은 적 없는 불청객처럼 멈칫했습니다. 몇 점의 캔버스가 완성되어 있었지만, 나를 그린 것이 맞는지 의아해졌기 때문입니다. 캔버스 위에 - 나는 이 글에서 캔버스라는 용어를 계속 고수하기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담긴 내용물이 나를 묘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단순히 꽃 그림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의문이라서요. - 입체감 있게 모델링된 이미지는 무척이나 진지하게 꽃의 외양을 담아낸 상태였지만 그 질감도, 색감도, 물성도, 온전한 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혹시 최초의 꽃이 어떤 모습인지 아시나요? 2017년 8월 1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공동 연구팀은 1억 4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지구상 최초의 꽃의 모습을 컴퓨터 이미지로 재현해냈습니다. (그래요. 사람들이 그러듯이 저도 인터넷에서 스스로에 관해 종종 찾아보곤 합니다. 지구에서 인간의 유일한 쓸모는 타자에 관한 기록을 부지런히 정리해놓는 능력이라고 나무는 얘기하곤 했지요.) 하얀 목련과 흡사한 그 디지털 이미지는 아주 단순한 구성이었지만 다섯 개의 암술과 열 개의 수술,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는 꽃덮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고유한 성질과 존재의 목적, 또한 차후 분화의 방향을 가늠하게 만드는 데이터로서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미지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그 이미지를 토대로 너도나도 꽃의 진화 경로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비견해서 말하자면, 그녀가 캔버스 위에 만들어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나에 관해 아무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존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할까요? 혹자는 이것을 ‘최후의 꽃’이라 일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캔버스 위에 반투명하게 굳은 채로 포개어지고 드리워진 꽃잎들은 나를 반쯤은 감추고 반쯤은 드러냈습니다. 그 큼직한 자락들은 때로는 휘장처럼 늘어져 있고, 때로는 무언가에 눌린 듯이 구겨져 있었습니다. 나를 묘사한 것도 아니고 재현한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상상해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동물의 가죽을 곱게 벗겨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박제라면, 그녀가 내게 한 일은 말하자면… 응고. 그렇습니다. 이 예술가는 나를 응고시켰습니다! 실재로서의 꽃, 특정 공원의 특정 구역에 핀 특정 제비꽃이나 특정 붓꽃이 아니라, 꽃이라는 존재 자체를 반투명한 무색무취의 공간 속에 가두어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꽃이라는 존재가 대체 뭐란 말인가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관찰을 이어나갔습니다. 두툼한 꽃덮개들은 겹겹의 층을 이루고 있었는데, 갓 피어나 새벽이슬을 머금은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된 접시꽃마저도 살아 숨 쉰다는 느낌보다는 호흡을 멈추고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은 2차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입체적이고 3차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면적이었습니다. 캔버스 밖으로 흘러내리는 부분으로 인해 더 도드라져 보이는 사각 프레임 때문인지, 광학기술과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함께 만진 것만 같은 표면의 기이한 질감 때문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는 어떤 운동도 없고, 공기도 없고,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기하학적 픽셀로 대체된 나의 장기와 조직이 캔버스 배경 위에 실체 없는 유령처럼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조금 난감해졌습니다.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인 경험으로나 그림 속에서 나는 늘 실제의 나보다 더 의미가 분명한 존재였는데, 지금 눈앞에 존재하는 이 이미지와 나의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당혹감 때문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나를 꽃의 혼이라고, 혹은 꽃의 내면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꽃의 이데아라고 호명할 것입니다. 비인간 존재에게 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인간들에게 유독 흥미로운 주제라고 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지만,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는 문제입니다. 한 인류학자는 어느 대담에서 인간 중에서도 유독 작고 멋진 존재인 할머님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며 웃었습니다. “동물이 혼을 가지고 있다는 게 뭐 대수겠어요? 내 장미 덤불도 혼을 가지고 있다고요!”1 지금껏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간들이 나를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호모사피엔스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보아온 바로는, 인간은 외부 세계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는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눈앞에 대면해 있는 것으로, 무릎 꿇리거나 사랑을 퍼부을 수 있는 타자로 위치시켜 놓은 다음 그 대상과 관계 맺는 데서 가까스로 자신이 세계의 일부임을 느낍니다. 그럼으로써 육체라는 경계를 지닌 생명체로 운명지어진 고립감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인 것 같아요. 인간의 모든 활동은 구체적인 접촉이나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무엇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과 절망감을 내재하고 있는 듯합니다.
또 다른 인류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문화라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그[인간]는 이 매개물을 통해 보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2 과연 그럴까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캔버스들은 이러한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온 자신들의 태도에 일말의 주저함을 부여하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다시 캔버스 위에 조형된 덩어리들을 쳐다보았습니다. 중력에 의해 늘어나면서 군데군데 찢어진 부분은 늙은 동물의 가죽처럼 보이기도 했고, 발에 밟힌 목련의 상처 같기도 했고, 이윽고 ‘막’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막의 존재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식물 세포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막은 아주 얇고 유연한데, 그 두께가 7.5~10나노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녀가 만들어낸 휘장들은 세포막의 과장된 이미지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아예 캔버스 바깥으로 튀어나와 캔버스를 통째로 감싸고 있었는데요. 막은 그 누구도 – 나조차도 - 이 안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듯 팽팽한 장력으로 캔버스를 바라보는 시선을 튕겨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나의 개별자들을 불완전하게 모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토록 염원해왔던, 어떤 이해와 구원의 가능성을 단호히 차단하는 제스쳐가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자 이 예술가가 묘사해낸 것이 결국 –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와는 무관하게도 – 내가 아니라 그들 종족의 세계라는 느낌마저 드는 게 아니겠어요? 여러 식물종이 소멸되고 바이러스의 형질이 변이되고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현재 공동으로 처한 현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은 자연의 고갈 때문에 인공적인 것을 강화시키고 유일무이한 것에 대한 갈망 때문에 복제에 탐닉하고 있지요. 그들이 각기 과학과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 추진해온 것들은 모두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복잡한 속내를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간의 시간은 용감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자유롭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꾸준히 행할,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를요.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두려움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중생대에 우리 무리와 함께 번성을 누렸던 공룡들은 안타깝게도 자신들의 미래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하나의 죽음이라는 씨앗이 머나먼 시간이 지난 이후에 무엇을 남길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지요.
내가 그녀를 다시 찾아갔을 때, 한쪽에는 빈 상자들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내 손에 두꺼운 면장갑을 낀 사람들이 와서 완성된 캔버스들을 상자에 넣고, 밀봉하고, 잘 포갠 다음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아마도 희고, 밝고, 네모낳고, 깨끗한 공간으로 갔을 것입니다. 캔버스들을 보낸 뒤, 텅빈 작업실에서 그녀가 컴퓨터 모니터에 어떤 뉴스를 띄워놓고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960년대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에서 제임스 커크 선장을 연기했던 91살의 노배우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그는 지난해 우주 기업 블루 오리진의 로켓을 타고 고도 100킬로미터에서 우주와 지구를 바라보고 돌아오는 10여 분짜리 우주여행에 참여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우주를 보는 경험이 마치 장례식과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우주의 잔인한 차가움과 생명을 양육하는 지구의 따뜻함이 대조를 이루는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생각했던 모든 것이 틀렸음을, 우주에는 어떤 신비도, 장엄한 경외심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요. 기사는 이 노배우가 그토록 캄캄한 공허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우리의 행성과 생명의 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했다는 말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사를 반복해서 읽고 있는 그녀의 뒷통수를 보며, 그녀가 마음의 밑바닥에서 안개처럼 천천히 차오르는 공포를 (언제나처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음악을 틀기 위해 일어날 때까지 말없이 함께 있어주었습니다. 왜냐면, 나도 조금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캔버스들에는 내가 대충 숨어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들어맞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은 왜 나를 그리는가?”라는 의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그 결과물을 즐기고만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질문 자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캔버스들은 나를 그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환영이자 덫, 나의 요람이자 무덤입니다. 나 역시 조금은 길을 잃은 기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느낌조차도, 나의 존재조차도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닐 테지만요. 이제 나는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1. 필리프 데스콜라, 『타자들의 생태학』, 차은정 옮김, 포도밭출판사, 2022, 147쪽.
2. 레슬리 화이트가 강연 <인간, 자연, 그리고 인류Man, Culture, and Human Beings>에서 한 말. 『타자들의 생태학』 58쪽에서 재인용.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2022 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