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의 마음 (2020)





답답하지 않아요? 집에만 있는 것이 괴롭다며 누군가 물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이 제한되자마자 힘겨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며칠 지나니 죽겠다고도 했다. 나로서는 조금 신기한 노릇이었다. 답답함이라니. 출퇴근 시각의 2호선 전철이나 행인으로 가득찬 명동 한복판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좁아도 포근하고 다정하기만 한 ‘집구석’ 안에서는 당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그렇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집순이다. 자질이 빼어난 집순이에게, 코로나 시대가 던져 준 비대면의 삶은 그다지 어려운 숙제가 아니었다. 코로나가 국내에 처음 발생한 것은 1인출판사 돛과닻의 문을 연 지 두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첫 단행본인 『모나미 153 연대기』의 개정판 출간을 마치고 지출증빙 영수증 떼는 법, 택배 저렴하게 보내는 법 등 자질구레한 출판 업무를 익히는 중이었다. 병아리 사장이 되고 보니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업종 특성상 사람을 자주 만나거나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은 별로 없어 마음이 놓였다.

혼자서 하나씩 배워가며 하는 일이기에 더디고 어설프지만, 어쨌거나 돛과닻은 그럭저럭 순항 중이다. 미술작가라는 불안정한 직업에다 큰돈이 될 리 없는 1인출판사를 부업으로 얹은 것은 딱히 근사한 청사진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장기적 전망을 생각하면 다른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만들고 싶은 책을 자유롭게 펴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덜컥 시작한 일이었다. 당장 몇 년간은 득보다 실이 많을 수 있겠다는 계산도 뒤늦게야 섰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쓴다는 점이다. 나는 전업작가라는 단일한 정체성을 띠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동안 적잖이 한눈을 팔아왔다. 파트타임으로 출근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고 이런저런 직종의 취업 전선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잠도 많거니와 함께 사는 고양이들에게 최대한 시간을 내어주며 살고 싶은 나에게, 정기적인 출퇴근 업무는 애초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나는 집에서 혼자 일하는 게 즐겁다. 원래부터 집에만 있기를 좋아했는데, 쭉 그러라고 국가가 나서서 독려하니 내심 고맙기까지 했다. 덕분에 집에만 있어도 게으르고 한심한 예술가 취급을 받을 염려가 줄었다. 아무런 증상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건만 나는 자주 스스로를 자가격리한다. 어쩌다 약속이 있어 바깥 세상에 나가면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와 대면하게 된다. 업무에 수반되는 각종 미팅들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것이 내게는 가장 반가운 소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상존하는 상황인데, 재난의 시국이 이토록 편안하게 느껴져도 되는 걸까 죄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의 일과를 시간 순으로 소개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좀처럼 시간의 규칙에 따라 하루를 꾸리지 않는 탓이다. 특별한 외부적 요인이 없다면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배가 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편이다. 나는 시간보다는 공간의 범주에 기대어 산다. 머무는 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패턴을 만들고 거기에 몸을 맞출 때 삶의 중력을 조금 덜 받는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의 하루는 공간을 따라 흘러간다.

책상, 침대, 혹은 또다른 집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가장 중요한 가구이자 집기 1호는 역시 안방에 있는 책상이다. 몇 해 전 저렴한 값에 구입한 고무나무 테이블로, 혼자 쓰기 적당한 넓이에 편안한 질감을 가졌다. 집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주인공처럼 놓여 있다. 책상은 내가 의식주와 업무를 해결하는 기본적인 생활공간이다. 일과의 세부가 결정되는 작은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인터넷도 하고 밥도 먹고 계산서도 쓰고 책 홍보사진 촬영도 하고 뜨개질 같은 취미활동도 한다.

하나의 공간을 전천후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유연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면 된다. 원고 교정지를 읽다가 쉬고 싶으면 수시로 넷플릭스를 켠다. 영화를 보면서 요리를 하고 싶을 때면 노트북 앞으로 반찬 재료를 가지고 와서 손질한다. 책상이 곧 식탁이자 조리대이자 독서대이자 작업대이자 고양이소파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면,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일에 번갈아 임할 수가 있다.

나는 한번 책상에 앉았다고 해서 시간이나 분량을 정해두고 일하지는 않는다. 성공한 소설가나 화가의 자서전을 보면 꼭 하루에 몇 시간씩 정해진 시간만큼 작업을 한다고 하던데, 작가로서도 편집자로서도 나는 그래본 적이 없다. 함께 사는 고양이가 책상 위로 올라와 키보드 치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하면 대체로 책상의 시간은 끝이다. 나는 일을 잠시 멈추고 고양이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하고, 부엌으로 옮겨가서 다른 집안일을 하기도 한다.

침대에 누워서 하는 일도 있다. 아이디어를 간단히 메모하는 일, 필요한 물건의 최저가를 찾아 쇼핑하는 일, 이메일을 확인하고 답장하는 일, 퇴고를 마친 글을 마지막으로 한번 읽어보는 일, 간밤의 꿈 이야기를 적어두는 일, 이런 일들은 책상보다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하는 게 잘 된다. 그러다 졸리면 낮잠도 잔다. 게으름은 프리랜서가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니까. 나는 최대한 게으르게, 몸과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설렁설렁 움직인다.

그러다가도 집중이 유난히 잘 되는 날이 있다. 이때는 한자리에 앉아 오래오래 일을 한다. 불 켜는 것도 잊고 어둠이 내려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꼬르륵 소리로 인지할 때까지 말이다. 초집중 모드로 전환된 내 모습을 본 적이 있는 한 친구는 말했다. 몸 주변에 동그랗고 투명한 유리막을 친 것 같았다고. 그럴 때면 고양이도 나를 조금 건드려보다 마는 것 같다.

혼자서 공간을 독점하며 일하는 데에 오랜 시간 익숙해지다 보니 조금은 비효율적인 습관도 생겼다. 단순한 반복노동에 가까운 일은 상관없지만 머리를 굴려야 하는 단계에 있는 작업은 근처에 누가 있으면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글의 초고를 쓸 때나 세밀한 수정이 필요한 작업, 꼭꼭 씹어 삼켜야 하는 독서에는 반드시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러 차례 다듬어진 글을 교열 볼 때나 이따금 외주 아르바이트로 맡는 디자인 일을 할 때, 또는 인터넷 자료를 리서치할 때처럼 긴장을 조금 풀어놓아도 되는 일에는 공간의 제약이 적어진다.

게다가 하루 종일 혼자서 지내다 보면 환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동네 단골 카페에 간다. 이 카페는 커피 주문 후 두 시간 이내에 리필이 가능해서, 커피 두 잔을 동력 삼아 네댓 시간 정도 바람 쐬는 기분으로 일하고 싶을 때 찾으면 좋다. 적당한 소음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타인의 존재감은 생각을 새로고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글도 초고는 집과 작업실의 책상 위에서 쓰고, 퇴고는 카페와 난지천 공원 벤치에서 했다.

아무튼 막연한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때 방구석에만 있어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입이나 우연한 사고의 전환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익숙하고 친밀한 책상 위에서 나는 나 자신과만 내밀하게 대화하려는 습성을 갖기 때문이다. 지난 해 쓰고 펴낸 책 중에 『사로잡힌 돌』이라는 책이 있다. 돌을 다룬 예술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이미지 비평서다. 그 책은 제주 우도의 아티스트 레지던시 숙소에 머물면서 완성했다. 낯선 섬마을의 환경은 평범한 돌을 다른 시선으로 읽어내려는 기획에 잘 어울리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방에서 들리던 바람소리와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땅콩밭의 풍경이 책 어딘가에는 깃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작업실이나 여행지에서 남긴 글에는 공간이 준 에너지가 지문처럼 간직되어 있다.

집순이의 마음은 모순적이다.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고 이불 밖은 무조건 위험하게 느껴지는 그런 상태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동시에 늘 집 아닌 곳에 집을 구축하는 상상을 한다. 공간에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일수록 하나의 공간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중요해진다. 돌아오기 위한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자처럼, 진정한 집순이는 집이라는 베이스캠프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짧고 긴 외출들을 적절히 안배한다. 바깥으로 나간다는 행위의 의미가 사뭇 달라진 지금이지만, 각자가 운용할 수 있는 만큼의 기동성과 융통성을 발휘할 필요는 더 커진 것 같다.

천변 산책

요즘 불광천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하나 둘 물들어가는 가로수 아래 키 낮은 억새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둑을 뒤덮은 들꽃 덤불들 사이로 이따금 왜가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동네로 셋집을 얻어 이사 오면서 이런 풍광을 가까이 누리는 기쁨을 덤으로 얻었다. 그래서 일과에서 산책의 비중이 늘었다. 특히 어둠이 내린 뒤 고요한 천변을 따라 걷는 밤 산책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즐거움이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어 헬스장도 요가원도 문을 닫았을 때는 천변에 산책자가 부쩍 늘어났다. 평소에 누리던 호젓함은 다소 포기해야 했다. 그래도 각자의 템포로 걷는 산책에서 어느 누구도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스포츠 정신이라곤 없는 나에게 산책은 최고의 운동이다. 목적도 경쟁 상대도 없이 가볍게 걷는 시간은 굳은 몸을 풀고 마음을 다독여 준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한 자락의 자연을 발견하는 일도 좋다. 그러나 산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걷는 동안 내 안에 축적되어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뚜껑을 열어 놓은 유리병 속의 탄산처럼 천천히 몸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산책을 하기 전과 후의 나는 언제나 조금씩 다르다. 산책은 스스로와 나누는 가장 좋은 대화가 틀림없다.

불광천은 홍제천과 만나서 한강으로까지 이어진다. 길게 뻗은 천을 따라 마냥 걷다 보면 모든 것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을이 겨울로, 겨울이 봄으로 이어지듯이, 강은 또 다른 강으로 이어진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한 자리에서 소멸한 존재가 몸을 바꿔 다른 장소에 다시 거하도록, 시간은 만물을 운반하느라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혼자 걷고 있어도 이상하게 외롭지가 않다.

산책은 ‘디스크 조각모음’을 실행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반복되는 동안에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뿔뿔이 흩어져 떠돌던 기억과 조각난 감정들을 갈무리해 가지런히 정돈한다. 그러면 한 장의 찢어진 일력처럼 가치 없게 느껴지던 하루도 소중히 다시 기록되곤 한다. 귀가하는 길, 잘 복구된 마음이 혼잣말을 한다. 낮 동안 방구석에서 행한 그 모든 시도들이 그리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심지어 아무 소득 없이 멍 때리며 보낸 시간들조차도.

서랍 사용법

언젠가 방에 있는 서랍의 개수를 무심코 세어 본 적이 있다. 무려 마흔 개가 넘었다. 작은 방안에 웬 서랍이 그렇게나 많은지 깜짝 놀랐다. 손바닥만 한 문구용 플라스틱 수납함이든 커다란 원목 서랍장이든, 아무튼 내가 서랍이 달린 가구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해 보였다. 물건에만 적용되는 취향은 아닌 것 같다. 노트북과 외장하드 속에도 무수히 많은 서랍을 만들어 놓는다. 뭐든 꼭 하위 항목을 만들고 이름을 붙여 분류해 두어야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이렇게 카테고리별로 분류하고 보관하는 버릇은 다양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용할 수 있다. 짧은 하루 동안에도 나는 여러 개의 정체성을 오가며 일한다. 개인 작업물을 만들고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 출판사를 알리고 홍보하려 애쓰는 병아리 사장, 원고를 매만지는 편집자, 각종 아르바이트와 프로젝트의 마감에 시달리는 외주 노동자, 일상의 과제들을 수행하는 생활인, 세 마리의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 등등. 이들은 모두 내가 가진 하나의 몸 안에 있고 역할이 조금씩 겹쳐 있기도 해, 그때그때 스위치를 누르듯 간단히 모드를 전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폴더별로 분류된 가상의 공간 덕분에 조금은 수월하게 여러 업무를 오갈 수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애플 앱스토어에서 나의 디지털 서랍 관리에 능률을 올려 줄 귀여운 프로그램 하나를 구입했다. 데스크탑 속 폴더의 색깔을 마음대로 바꿔 주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서랍장에 페인트칠을 하는 기분으로 폴더 색깔을 하나씩 지정해 주었다. ‘돛과닻‘은 파란색으로, ’신작‘은 노란색으로, 그리고 ‘2019공모지원’처럼 이미 과거의 영역이 된 것은 회색으로.

참고로 고백하자면 나의 카테고리는 특별히 일목요연하거나 구조적이지는 않다. 주관적이고 이름도 제멋대로다. 일례로 바탕화면 한쪽 구석에는 ‘놀고싶다’ 폴더와 ‘화가난다’ 폴더가 상주하고 있다. 간간이 수집한 동물 짤이나 흥미로운 읽을거리는 ‘놀고싶다’ 폴더에 스크랩했다가 심심할 때 들어가 본다. ‘화가난다’ 폴더에는 주로 골치 아픈 서류들을 모아 둔다. 기금을 수혜 받은 해의 연말 정산 시즌이 되면 ‘화가난다’ 폴더에 자료를 몽땅 집어넣고 며칠 동안 열심히 정산 처리를 한다. 백업까지 마치고 난 뒤에는 폴더를 클릭해 통째로 휴지통에 버리는데 그 쾌감이 제법 크다.

찬장 앞에서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 프리랜서는 더 잘 먹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특히 혼자 사는 경우라면 두 번 세 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일상의 운행을 건강히 해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부지런히 챙겨 먹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잘 먹는다는 것이 단순히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뜻만은 아니다.

여느 프리랜서들처럼 나도 ‘혼밥’에 익숙하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집밥’을 하루 한 끼 이상 만들어 먹으려 노력한다. 혼자서 해 먹는 집밥이라는 것이 허기를 달래는 요기 이상이 되기는 쉽지 않다. 식사 시간도 규칙적이지 않거니와, 보는 이도 나눠 먹을 이도 없는데 정성 들여 차릴 필요나 이유를 못 느끼게 마련이다. 20대 때는 나도 냉장고에서 대충 음식을 꺼내 최대한 빠르고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그런데 야간작업과 불규칙한 식습관으로 점철된 생활이 몇 년 쌓이면서, 젊음으로 지탱하던 건강이 차츰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급기야 한번 몸이 단단히 아프고 난 뒤, 식사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신경 써서 스스로를 밥해 먹이는 일이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그 몸에 깃든 마음을 정성스레 돌보는 일이기도 함을 알게 된 것이다.

채식 위주로 식습관을 유지하고 먹거리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나는 형식적인 것에도 부러 신경을 쓴다. 혼자서 먹더라도 고운 매트를 깔고, 대단치 않은 반찬이라도 가지 수대로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낸다. 자랑 삼아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 보기 좋으라고 하는 수고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혼자라서 가능한, 불필요한 의례에 가깝다. 내가 나를 잘 돌보고 있다는 확신, 어디 아픈 곳 없이 오늘도 한 끼 무사히 차려먹었다는 감사함, 그리고 거기서 오는 마음의 안정은 설거지를 조금 더 하는 귀찮음 정도는 상쇄하고도 남는다.

집밥에 관해 생각하다 보면 뜬금없게도 까뮈의 『이방인』이 떠오를 때가 있다. 유독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어서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후 종일 발코니에서 거리 풍경을 내다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뫼르소가 “저녁을 만들어서 그냥 선 채로 먹었다”라고 서술하는 부분이다. 그 문장이 어쩐지 뫼르소라는 인물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김없이 주어지는 일상을 그저 영위하기 위한 행위. 무언가 하기는 해야 하니까 신문을 읽고 섹스를 하듯이, 먹기는 해야 하니까 먹는 행위. 나는 나의 집밥이 그 근본적인 허무를 이겨내려는 작은 노력의 반복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찬장에서 가장 예쁜 그릇을 골라 꺼낸다.

혼자 하는 일

1인출판은 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기획부터 섭외, 교열, 홍보, 판매, 유통, 정산에 이르기까지. 그 전 과정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포장이다. 책을 쌓아 놓고, 적당한 노동요를 튼 다음, 봉투에 책을 넣고 주소를 붙이는 단순노동.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는 단순한 작업을 원래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팔았다’는 기쁨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포장하는 시간만은 늘 마음이 평화로웠다.

지난 여름, 텀블벅 후원자들에게 책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포장업체를 사용해 봤다. 일반 배송비와 별반 차이도 없는 약간의 인건비를 드리면 업체에서 책을 포장하고 주소를 프린트해 붙여서 하루 만에 깔끔하게 배송해 주신다. 1회 배송이 100건만 넘어가도 써볼 만한 서비스 같았다. 그런데 할일을 하나 덜었는데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 손으로 책을 독자들에게 떠나보내는 시간을 잃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 고요하고 하릴없는 단순노동의 시간. 책을 봉투에 넣다가 괜히 펼쳐 한두 구절 되새김질해 읽기도 하고, 스티커를 붙이며 낯모르는 독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무슨 대단한 정보라도 되는 양 읽어보곤 하던 그 시간을 빼앗겼다니….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나중에 혹시 돛과닻이 너무 잘 되면 어쩌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 물론 내가 만드는 책이 많은 사람에게 가 닿고, 출판사가 괜찮은 수익을 거두어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출판사의 몸집이 커질수록 혼자서는 하기 벅찬 일이 늘어날 테고, 그 일들은 대량화된 시스템이나 고용된 타인의 손에 맡기게 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종류의 작은 기쁨들도 함께 떠나보내야 하리라는 사실을 안다.

액셀로 뽑은 주소 파일을 포장업체에 간단히 넘긴 뒤, 허전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씩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원하는 것만 가지는 건 공평한 게임이 아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노동의 피로와 보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기억해야 할 것은, 혼자서 일하는 기쁨은 누릴 수 있을 때 실컷 누려야 하리라는 것이다.

한편, 혼자 하는 듯이 보이는 일에도 타인과의 관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가 있다. 돛과닻의 두 번째 책을 만들면서 나는 편집자의 역할과 의미에 관해 새로이 배웠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에 관한 미술가들의 에세이집 『나는 있어 고양이』는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의 공동 저자가 썼다. 책을 제작하고 세상에 내보내는 과정에서 여러 필자들과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추천사를 부탁드릴 분들, 온라인서점 MD, 서점 주인, 기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해야 했다. 여러 사람과 메일을 주고받고 문서를 확인하는 일에는 꽤 많은 시간과 품이 들었다. 출판이라는 일은 지면과 활자만이 아니라 사람을 향해서도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1인출판이라는 작은 규모 속에서도, 비대면 시대의 업무 시스템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일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진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학습하고 있으니, 참 갈 길이 멀다.

집순이의 마음

내향적인 사람이란 타인과 만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나고 돌아온 뒤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있다. 나도 그렇다. 귀가 후에는 외출 시간의 몇 배에 달하는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에만 있어 버릇했더니 회복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는 것 같다. 때로는 만난 사람의 수에 비례하고 때로는 대화의 피로도에 비례하는 이 회복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나는 꽤 공을 들인다. 중요한 용무가 있는 시점이 아니라면 단체 대화방의 알람은 모두 꺼 둔다. 그리고 고양이들과 눈을 오래 맞춘다. 가만히 누워서 체온을 나눈다.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함께 호흡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향성 인간들에게 고양이란 영혼의 급속충전기이며, 혼자이면서 함께인 상태를 누리게 해 주는 일종의 축복이다.

그런데 집순이의 마음은 좀 복잡하다. 이 폐쇄적인 시공간을 휴식으로 누리는 여유가 모두에게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발이 묶인 상황이 생계의 고난으로 직결되는 직업군도 많을 것이다. 또 사람 아이는 고양이와 달라서, 동거인이 얼마나 오래 이불 속에서 함께 뒹굴거려 주는가에 행복의 척도가 달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집이 답답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리운 것들이 늘어 간다. 친구들과 경쾌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 국경을 넘어 훌쩍 이동하는 여행. 자유로운 전시와 영화 관람. 마스크 필터를 거치지 않고 들이마시는 아침공기와 밤바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계절처럼 애틋한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적어 보면서, 일상의 풍경과 조건이 다시금 달라질 날이 올까 궁금해졌다. 그때까지 우리는 꿋꿋이, 열심히, 적극적으로 혼자여야 할 것이다.

가끔 나는 자문해 본다. 혹시 스스로에게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가? 조금만 피곤하면 쉬라고 하고, 작은 미션 하나라도 완료하면 마구 보상을 주려 하니, 이거 너무 자신을 외동 삼대독자 대하듯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프리랜서라는 캄캄하고 외로운 터널에 들어선 이상, 나는 억지로라도 나에게 잘해주려는 태도를 조금 더 고수하고자 한다.

자신에게 가혹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세간의 믿음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현대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충분히 스스로를 혹독하게 대하고 있다. 특히나 문화 예술에 종사하는 이들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취로 잘 계량화되어 드러나지 않는 창작 활동에 대한 자괴감 탓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라면, 좀 더 스스로를 오냐오냐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은 별다른 게 아니라 마음이 요구하는 바를 귀담아 듣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에 온다. 스스로를 아낀 힘으로 타인도 아끼고, 자기 내면을 살핀 눈으로 세상도 살피고 헤아리는 것. 그래서 세상에 꼭 필요한 목소리와 시선을 만들어내는 것. 쉽지 않은 그 단계를 가능케 하는 마음의 근육이 사실은 자기 돌봄의 지난한 노력 속에 키워지는 거라고, 집순이는 오늘도 굳게 믿고 있다.





-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 글항아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