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이야기, 갱신하는 이미지
- 미술이 내러티브를 다루는 몇 가지 방식에 관해 (2020)




흑백 화면.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것은 어느 서구 도시의 분주한 거리다. 자동차 경적, 행인의 발걸음 소리 따위의 현장음과 함께, 누군가에게 연기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성의 목소리가 화면 밖으로부터 들려온다. 아마도 촬영 현장에서 메가폰을 쥔 감독일 것이다. 한 배우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감독이 '자, 빨리빨리 건너요!'라고 외치자 배우는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한다. 화면 밖 음성은ᅠ계속해서 배우들의 행동을ᅠ연출한다. 지시에 따라 차는 멈췄다 가고, 행인 역을 맡은 이들은 담배를 꺼내 물거나 껌을 씹으며 걷는다. 그런데ᅠ물 흐르듯 매끄럽던ᅠ연출ᅠ장면이 갑자기 이상해ᅠ보이기 시작한다. 감독이ᅠ하늘을 날아가는 비둘기 두 마리의 움직임까지 정확하게 지시 내리는 것이 아닌가? 비로소 명확해지는 사실. 이 영상은 배우들의 연기를 연출하는 영화 제작 현장이 아니었다. 실제 거리를 촬영한 뒤 그 영상을 보며 행인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음성을 녹음해 적절한 타이밍에 삽입한 일종의 속임수인 것이다. 
이번에는 구식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설치된 영상을 보자. 오랜 세월 MBC 뉴스를 진행했던 엄기영 앵커의 모습. 한국인의 눈에 아주ᅠ익숙한 뉴스 장면이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열어 내뱉는ᅠ것은ᅠ낯설기 그지없는 문장들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만약에 우리가 비가 와도 젖지 않고 눈이 와도 춥지 않고 돈도 떨어지지 않고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머리가 헝클어져 있지만, 빗으로 머리를 잘 빗으면 다시 단정한 머리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어제까지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었는지 잘 기억해 보면서 머리를 빗으면 어제 아침과 거의 같은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공중파 뉴스는 '사실'의 대명사로 불릴 만한 매체고 그 매체의 얼굴인 앵커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사실도 사건도, 인과관계도ᅠ기승전결도 없다. 당연하게도 엄기영 앵커는 뉴스에서ᅠ이런 말을ᅠ한 적이 없다. 작가가ᅠ수많은 뉴스를 음소별로 잘게 잘라 짜깁기해 붙인 것이니 말이다. 

앞의 영상은 존 스미스(John Smith)의 <껌을 씹는 소녀(The Girl Chewing Gum)>(1976)【도판1】, 뒤의 영상은 김범의 <무제(뉴스)>(2002)【도판2】다. 두 영상은 각기 영화와 뉴스라는 매체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이용해 시청각 정보와 내러티브의 선후관계를 재치 있게 전도시킨다. 평소ᅠ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미술과 내러티브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 작품들로 서두를 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대미술에서 내러티브를 다루는 방식이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전통적 이야기 구조에서와는ᅠ상당히ᅠ다르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흔히 '서사'라는 말로 번역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서사는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언어적 재현 양식이다. 일기와 같은 사적 기록에서부터 뉴스, 역사와 같은 공적 기록에 이르기까지 삶의 기록물 전반은 물론이거니와 설화, 전설, 우화 등 '이야기'로 통칭하는 모든 양식과 소설, 영화, 연극 등 '줄거리'를 지닌 모든 예술 장르에서 서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ᅠ속성을 띠고 일련의 사건을 서술한다면 미술 작품도 내러티브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현대미술로 말하자면 이미지, 사운드, 움직임, 언어, 전시 공간, 시간성, 물질성, 관객의 개입 등 너무나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미술의 외연이 나날이 확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ᅠ시각적 스펙터클이다. '시각예술'이라는ᅠ단어로 손쉽게 범주화되는 이ᅠ복잡한ᅠ예술 양식 안에서, 내러티브는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술이 내러티브와 맺는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미술에서ᅠ내러티브의ᅠ역할은 특정 사건이나 이야기를 시각화해서 전달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동시대 미술은 혼성적 형식의 탐구라는 문화적 조류에 조응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고침 되는 한편, 아방가르드 이후 삶과 예술의 경계를 다시금 무너뜨리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적극 참조한다. 또한 매체의 성격 자체를 텍스트로 다루는 메타적인 실험이 늘어나면서 미술과ᅠ내러티브의 관계는ᅠ독특한 지형도를 그리게 되었다. 미술이 내러티브를 다루는 방식의 특이성은 미술이라는 매체 자체의 특이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최근 관심 있게 본 몇 편의 국내 작품과 내가 내러티브 중심의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고민해 온 바를 바탕으로 그 지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Ⅰ. 아카이빙: 사진을 보는 어떤 관점

어떤 매체가 서사의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시간성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 여기서 시간성이란 현실에서 경험하는 시간의 길이와는 무관하다. 이를테면 자고 있는 남자를 여섯 시간 동안 하나의 쇼트로 촬영한 앤디 워홀의 영상보다 찰나를 촬영한 듀안 마이클의 네 장짜리 사진 연작이 훨씬 더 서사적이다. 시간의 지속성보다는 시간의 연속성에 의해 서사는 강화되는 것이다. 일련의 사건이나 행위가 복수로 배열되었을 때 그 선후 간의 관계로부터 이야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서사를 드러내는 눈에 띄는 경향 중 하나는 바로 다수의 이미지를 채집해 특정 규칙에 따라 재배열하는 방식이다. 나는 이러한 작업 태도를 '수집가의 시선'이라 부른다. 주로 일상의 기록이나 역사 혹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수집과 선별의 과정, 그리고 이를 콜라주나 아카이브로 구성하는 전략이 작업의 바탕이 된다. 이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언어에 의존하는 서술보다 시간의 집적을 더 충실히 묘사할 수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시간의 집적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많은 경우 '기억'이라는 키워드를 관통하게 된다.
김주원의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2019)【도판3】은 과거에 촬영한 일상 스냅 사진들을 텍스트와 나란히 배치해 영상으로 만든 작업이다. 작가의 시시콜콜한 취향이 묻어나는 일상의 풍경에서부터 당시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드러나는 시대적 풍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찰나의 이미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이미지 옆의 텍스트는 사진의 배경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와 촬영자의 주관적인 소회 사이 어딘가를 떠돌며 종잡을 수 없는 시간의 궤적을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원칙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텍스트가 끊임없이 죽음을 호명한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자살한 친구의 죽음. 지구 반대편 뮤지션의 죽음. 얼굴은 모르고 이름만 아는 동시대 누군가의 죽음. 그리고 거듭 확인하게 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나 자신의 죽음. 대단한 슬픔이나 애도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삶의 그래프 위에서 어떤 부고는 티 나지 않는,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상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부를 만하다. 
하지만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관된 사건의 주인공도 없고 기승전결도 없기ᅠ때문이다. 이 작품은 제작 방식부터가 일반적인 서사의 구성 원리와 관계 맺고 있지 않다. 이미지의 순서는 특정ᅠ줄거리를 성립시키기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다. 작가는 몇 년간의 데이터가 축적된 하드디스크 폴더 속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 이미지를 영상 타임라인에 순서대로 방출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사진 속 이미지는 어떻게 기억되는 것일까?"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우리는 기계가 기억을 대신 해주는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 추억은 데이터값을 가지게 되었고, 원한다면 언제든 그것을 불러낼 수 있다. 디지털ᅠ사진의 파일 정보를 열면ᅠ촬영 시간이ᅠ분초 단위로 정확하게 나와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억을 온전히 복기하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작가는 자신이 보유한 기억과 파일이 제공한 정보, 그리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당시ᅠ관련ᅠ기사 등 여러 루트를 통해 수집한 정보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미지는 촬영 당시와는 다르게 읽힌다. 사진 속에서 조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풍선을 묶고 있는 아버지는 이튿날ᅠ갑자기ᅠ세상을 떠났다. 이 사진은 탄생을 이야기하는 이미지인가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미지인가? 또 어떤 사진 속에는 무언가에 베여ᅠ붉은ᅠ피가 맺힌 손가락이 등장한다. 누구의 손이었던가? 셔터를 누를 때 촬영자는 웃고 있었던가? 취한 밤의 기억처럼, 과거와 과거는 뒤섞인다. 작가는 시위 현장에서 물대포를 맞고,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콘서트에 가고, 누군가의 부고를 듣는다. 순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시간이 모여 작가의 한때를 이루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바꿔 말해, 찍힐 때마다 다른 벽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성모마리아 조각처럼, 화자가 언제나 이 이야기들 속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기억은 재구성된다. 재구성되면서 다시 기억된다. 종교나 국가의 역사가 그래왔던 것처럼, 개인의 역사 또한 들추어볼 때마다 재조립되면서 우리 내면에 새로운 데이터로 저장되는 것이다. 이렇게ᅠ기억과 시간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아카이브의 시선은 사진을 보는 조금 다른 관점을 제안한다. 그것은 사진 이미지를 독자적인 시각 정보가 아니라ᅠ삶이라는 유기적 흐름의 일부로서 보는 관점이다. <과거가 과거를 부르는 밤>의 2019년 편집본은ᅠ길이가 92분에 달한다. 웬만한 장편영화보다 긴 러닝타임이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다 시각적 감흥을 주는 작품을 폰카로 촬영한 뒤 곧바로 돌아서는 데에 익숙한 미술 관객들에게ᅠ이렇게ᅠ긴 영상 작업은 만만한 관람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는가? 실은 이마저도 작가의 삶에서ᅠ도려낸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한 것을.

Ⅱ. 도큐먼트: 수행이 기록이 되기까지 

수행적인 성격을 가진 예술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자연이나 임시적 환경에서 구현된 시·공간 특정적 작품의 경우 과정의 기록이 특별히 중요해진다. 그 기록이 남겨진 사물과 함께 만들어내는 서사는 미술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송성진의 <한평조차(1坪 潮差, 1pyeong house between tides)>(2018)【도판4】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 갯벌 위에 한 평짜리 집을 짓고 2개월간 돌본 과정을 사진, 영상, 텍스트로 기록한 결과물이다. 폐목재로 만들어진 이 집은 썰물과 밀물이 오고 감에 따라 해수면 위아래로 드러났다 잠겼다 하면서 생존의 기본 조건인 ‘집’의 운명을 몸소 체험한다. 악조건 속에서 작가는 집을 온전히 존속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이는 한 사람의 일생, 집 한 채의 일생, 혹은 생성과 소멸의 운명에 처하는 한 마을의 일생까지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동, 표류, 인양, 지역 마을의 수락과 연대 등 한 평짜리 집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지구상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와 난민의 이야기들을 강렬하게 환기하기도 한다. 작가는 미얀마 난민들이 모여 사는 방글라데시의 난민촌을 방문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집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다양한 난파선의 형태를 모티브 삼았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끝없이 떠돌며 사는 우리.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자 이주민이지 않을까. 작가는 그런 생각으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완성된 집은 갯벌 위에 세워졌다. 집은 말없이 자연에 내맡겨져 시간과 대면했다. 군더더기 없이,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딱 한 평만큼의 공간을 보유한 채로. 멀리서 보면 번듯하고 때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집은, 그러나 근본적으로 집이 될 수 없다. 애초에 땅이 아닌 갯벌에 지어 올린 집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무용한 행위일지 모른다. 다만 그 무용한 행위의 과정에서 집은 비로소 자신의 몸에 시간을 새기는 것이다. 집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말이다. 집은 조금씩 변화했다. 평화로울 때 집은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었지만, 파도가 거칠 때는 침수되어 떠내려가기도 했다. 여름철 두 차례의 태풍을 견뎌냈고, 마지막에는 설치의 일부로서 전시장 안으로 옮겨졌다.
태양과 염분에 바랜 집 옆에는 그간의 과정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 그리고 작은 책으로 제본된 기록일지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집을 짓고 보살피고 철거하기까지 하루하루의 일과를 기록했다. 손님과 함께 라면을 끓여 먹은 날, 집의 3분의 2 높이까지 물이 들어찼던 날, 썰물에 집이 떠내려가 주변에 도움을 청한 날, 집의 위치를 옮겨 선돌이 내다보이던 고즈넉한 창문 풍경을 잃어버린 날 등 작가와 집이 함께 겪은 시간이 일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내용에다 여기저기 찢겨나가고 너덜너덜해진 일지의 외양이 더해져 읽는 이로 하여금 두 달이라는 시간의 경과를 느끼게 한다. 물론 일지가 낡은 것은 전적으로 전시장에서 관객들의 손을 탔기 때문이지만, 묘하게도 그 결과물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보이지 않는 요소를 가시적인 것으로 전환하고 서사에 현실감을 부여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집은 이제 미술품이 되었다. 한 평짜리 건축물은 삶의 터전에서는 사람 하나 겨우 발 뻗고 누울 협소한 면적이지만 전시장에서 보면 상당히 거대한 오브제다. 그러나 그 임시성, 언젠가 폐기될지 모를 설치 작품으로서의 운명 때문일까, 혹은 수행의 시간이 다 끝난 뒤 피로가 새겨진 껍데기로만 남은 탓일까? 이상하게도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은 헛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마루 한쪽 끝에 낚싯줄로 연결된 일지가 목제 오브제를 보이지 않는 중력으로 붙들어 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일지 속 문장들은 얇디얇은 획의 글씨로 이루어져 있지만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거미줄처럼 뻗어 나와, 이 집의 의미를 현실이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서 읽게끔 한다. 
작품의 제목 ‘한평조차’는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한 평짜리 집의 배경 조건으로 주어진 조수 간만의 차를 지시하는 한편, 몫 없는 자들이 몸 뉠 땅 한 평조차 갖기 힘든 현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쓸모를 잃은 집은 언젠가는 해체될 것이다. 혹은 기억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남겨지는 것은 집의 경험이다. 달이 지구 둘레를 공전하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공전하는 한 밀물과 썰물은 반복될 테지만, 지난한 현실 속에서 거처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의 경험은 새로운 집에서 계속 써질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누군가 땅 아닌 땅에 집 아닌 집을 지어 올리고 있다. 

Ⅲ. 쓰기와 읽기: 다시 쓰는 내러티브

내러티브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텍스트는 여전히 주요한 도구다. 그런데 텍스트를 매개로 하는 작업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나는 언어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관심으로 출발했으나 점차 텍스트의 미학적 구성과 규모의 스펙터클로 전향한 제니 홀저 같은 개념미술가보다는 여성주의적 글쓰기의 한 태도로서 내러티브의 변주를 제시한 예술가들의 작업에 더 관심이 있다. 차학경이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영화와 문학의 경계에서 보여주었던 ‘다시 쓰기’ 혹은 ‘겹쳐 쓰기’의 실험이 한 예일 것이다. 이야기란 본질적으로 단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 없으며 문자 언어든 음성 언어든 언어가 갖는 의미 또한 확정적인 것이 아님을 그들의 글쓰기는 보여주었다. 거기서 발견되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언어의 정치성은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바깥에서도 유효한 질문거리들을 남겼다.
언어에 관한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이수진의 <소리 내 읽어주세요>(2019)【도판6】도 그 계보 위에서 읽을 수 있다. 이 텍스트 작업은 A4 사이즈 종이 한 장짜리의 작은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는 쓰기와 읽기의 실험이다. <소리 내 읽어주세요>가 문자로 전달하는 내용을 간추리면 ‘유명 성우였던 친척에게 일을 부탁하려 했는데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하지 못했다.’는 것이 서사의 전부다. 그래서 만들려던 영상은 만들지 못하고 그 사건을 이렇게 텍스트로 남겼다는 것이다. 한글로 된 텍스트는 구식 아날로그 타자기로 쳤기 때문에 행간이나 자간이 불규칙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글자가 겹치기도 하고 가위표를 쳐 지워진 곳도 있다. 문장들은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같은 내용이 조금씩 변형되어 두세 번 반복되기 때문에, 마치 누군가의 더듬거리는 육성을 그대로 받아쓴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떻게 보면, 동일한 의미라도 각기 다른 문장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번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장은 서술자의 내면에서 일차적으로 번역된 문장인 것이다.
글과 말의 번역 (불)가능성 및 언어와 정체성의 관계라는 이수진의 테마는 그의 다른 영상 작업들에서 더 명료한 주제로써 다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단순한 텍스트 작업이 유독 흥미로운 것은 언어로 서술하기라는 매우 기본적인 내러티브의 방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나려는 미술적 실험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모국어로 쓰인 쉬운 문장들의 조합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작가가 소리 내 읽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텍스트를 한 번 소리 내 읽어본다. 이것을 어떤 톤으로 읽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성우였던 친척 아저씨가 과거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실에 대한 더듬거리는 기록의 흔적은 화자의 육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재연하게 만들고,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할리우드 영화 더빙판 속에 아직 남아 존재할 망자의 육성도 동시에 상상하게 한다. 쓰기와 읽기는 말하기와 듣기라는 보다 감각적인 가상의 신체 경험으로 확장된다. 그 속에, 여러 겹의 글쓰기가 놓여 있다. 여러 겹의 목소리, 여러 겹의 뉘앙스,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를 이 사건에 대한 여러 겹의 진실.
서사는 결국 이야기의 뼈대가 아니라 이야기에 달라붙는 감각의 살점들로 인해 전달되고 살아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의 생몰연대는 바뀔 수 없다. 그러나 그 서술은 백 번이고 다시, 다르게 적힐 수 있고 다르게 읽힐 수 있다.

Ⅳ. 거짓말: 사실과 허구의 경계 지우기

나는 스스로를 창작자보다는 편집자로 여기며 작업에 임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때 '편집'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자료를 일련의 주제 의식에 따라 재구성하고 배열해 의미를 생산해 내는 행위를 뜻한다. 내가 작업에서 뭔가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편집의 과정에서 반드시 허구적 요소를 섞는다는ᅠ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나미 153 연대기>(2010/2019)나 <해마찾기>(2016), 최근작인 <파란 나라>(2019)는 모두 특정 사물이나 공간을 중심으로 우리가 스쳐 지나온 근과거의 역사에 허구의 역사를 혼합하면서 만들어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모나미 153 연대기>는 최근 출간한 개정판 서문에도 썼다시피 "볼펜 한 자루만 가지고도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다. 일종의 가짜 연대기인 이 소설은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상징인 볼펜을 맥거핀 삼아 1960~1980년대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문화적 흔적들을 추적하면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소환한다. <해마찾기>【도판7】는 인류 공동의 기억이 어떻게 망각되고 파국의 역사는 왜 반복되는가를 질문하기 위해 해마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태를 취하면서 가상의 존재를 현실의 이야기에 깊숙이 침투시키는ᅠ전략은ᅠ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의 기획전을 위해 제작한 <파란 나라>【도판8】에서 더 적극적으로 쓰였다.

서울시립 남서울 미술관은 과거 벨기에영사관으로 지어졌다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미술관이 된 건물이다. 나는 미술관이ᅠ위치한 사당이라는 공간을 한국 재개발 역사의 틈바구니에ᅠ남은ᅠ기묘한 잔재로 바라보면서, 리서치 과정에서 조우한 벨기에 만화 캐릭터 스머프를 이야기의 화자로 활용했다. 이들은 철거촌 주민, 노동자, 때로는 폭력의 주체 등 다양한 역할로 몸을 바꾸면서 한국 현대사에서 제자리를 박탈당한 이들을 환기한다.
이러한 유형의 작업을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어디까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어디부터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나 나는 허구와 사실을 섞을 때 이야기를 개연성 있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목표하는 것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본래 희미하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사실과 허구를 섞고 연대기적 서술과 비 연대기적 서술을 혼재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것은 확장된 다큐멘터리의 태도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허구적 역사는 언제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허구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와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세계, 그리고 불가능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세계, 이들 사이의 차이와 접점이 곱씹어질 만한 것으로 드러날 때, 허구의 이야기는 뜻밖의 정치성을 가질 수도 있다.
한 편의 작품 속에서 작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허구적인 이야기꾼일 수도 있고, 리서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재해석해 소개하는 연구원이나 사회학자에 가까울 수도 있고, 창의적인 형태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는 액티비스트일 수도 있다. 또는 동시에 그 셋 다일 수도 있다. 나는 미술에서의 내러티브가 기본적으로 그러한 복합적인 화자를 가능케 한다고 여기며, 내가 쓰는 이야기가 가급적 하나의 장르에 갇히지 않고 다층적인 성격을 가졌으면 한다. 그랬을 때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 또한 단일한 반응을 넘어서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영화에 대해 말했던 것과 흡사하게도, 나는 문학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잘 구현해 내는 것이 미술에서의 글쓰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다시 쓰기와 수행하기, 주어진 이미지와 언어의 의미를 매 순간 갱신시키기, 거짓말에 정치적 힘을 부여하기, 본 글에서 살펴본 작품들이 품고 있는 이러한 시도들이 미술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가능성에 동참하는 길이 아닐까 한다.   





- 《Visual》 16호,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