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의 오후] 추앙하는 시간 (2022)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쏘아올린 ‘추앙’이라는 단어가 뭇사람의 마음을 강타했다. 사랑으로는 부족하니 추앙하라는 주인공 염미정의 말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폭을 조금 확장시켰다. 그 단어에 감응한 시청자들은 주고받기에 길들여진 정형화된 사랑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떠올린 것은 고양이였다.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라면 어렵지 않게 동의할 테지만,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라는 그 단어의 의미에 고양이만큼 어울리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 쉽게 타협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영혼을 지닌 이 근사한 동물을 셋이나 모시는 까닭에, 나는 늘 우러러보고 숭상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추앙하며 한 계절을 보내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염미정의 대사처럼, 나도 고양이들과 살면서 얻은 게 많다. 그중 최고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침에 요다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의 아침도 가지런해진다. 모래가 내 무릎에 살며시 올라와 그르릉거리면 번잡스럽던 고민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녹두의 부드러운 뱃살에 손을 얹고 숨결을 느낄 때면 또 어떤가. 생명의 존엄에 대한 경외감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 어떤 날씨에도 우리 집에는 온기가 있다. 비가 오면 빗방울을 구경하는 또랑또랑한 눈망울들이 빛을 발하고, 날이 좋으면 고요히 털을 고르며 방에 깃든 햇볕을 만끽할 줄 아는 녀석들 덕분이다. 고양이에게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시간의 틈새마다 평화의 숨을 불어넣는 놀라운 면이 있다.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조건 없는 사랑과 맹목적인 신뢰를 경험하는 흔치 않은 관계다. 동물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고 어떤 점이 못났는지 판단하지 않는다.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충분한 신뢰가 쌓인 이후에는 무한한 믿음과 애정을 견지한 채 그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간혹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따르기를 종용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은 이해되지 않은 채로 놓아둔다.

업무와 생활, 가족과 친구를 막론하고 늘 ‘관계’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그만한 평화가 또 어디 있을까? 사람 문제로 쉽게 지치고 지리멸렬한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고픈 도시인에게, 존재만으로 힘이 되고 응원이 되는 반려동물과의 시간은 셈할 수 없이 소중하다.

예전에 누가 그랬다. 자기 인생이 여섯 시간이라면 한 시간은 고양이랑 보내고 나머지 다섯 시간은 그 시간을 그리워하면서 보낸다고. 나도 산다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고양이랑 보내는 한 시간 비슷한 것을, 그게 뭐든 간에, 각자 가지고 있는 거라고. 한 시간의 평화와 사랑이 나머지 다섯 시간을 먹여 살릴 수 있도록, 그 한 시간이 더 줄어들거나 헛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머지 다섯 시간에는 한 시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일을 하고 마음앓이를 하고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머지 시간들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게끔 만드는 것이다.

날이 더워지고 있다. 지치지 말고, 소중한 무언가를 추앙하며 살자. 그 동력으로 무언가의 나머지를 버티어낼 수 있도록.



- 시사인 반려인의 오후 연재, 2022년 6월, 7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