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인의 오후] 털북숭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 (2022)





고양이를 처음 키우기 시작했을 때, 나를 일컫는 호칭을 두고 오래 고심했다. 많은 반려인이 개나 고양이 앞에서 자신을 엄마 또는 아빠로 정체화하곤 한다. 쓸데없는 자기검열이 작동했다. 무턱대고 스스로를 엄마의 자리에 놓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 대신 고양이를 기르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언니 누나 정도의 표현으로 절충하는 것도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쉽게 해결책이 나올 리 없었다. 사실 이건 꽤 철학적인 질문이다. 털북숭이 동물과 그 동물을 살뜰히 돌보아 키우는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인간의 행위는 사육과 양육의 사이 어디쯤 위치하나?

동물을 사유재산으로 보는 관념이 많이 사라진 지금도 ‘견주’라는 표현은 널리 쓰인다. 하지만 동물병원에서 “제가 메리 주인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메리와 대화할 때 “주인님이랑 공놀이할까?”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호칭이란 사실관계의 규정이 아니라 마음가짐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을 일컬을 때 흔히 ‘집사’라는 호칭을 쓴다. 고양이와 인간의 정서적 갑을 관계를 간파한 성공적인 농담이라 나도 즐겨 쓰지만, 어쩐지 이 농담을 일인칭으로 쓰기는 겸연쩍었다.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았다. 무릇 고용된 집사라면 신중하고 유능한 전문 직업인일 텐데 나는 감정적으로 불안정하고 호들갑스러운 초짜 반려인에 그치니까.

나는 내 이름의 자리를 비워둔 채 고양이 주변을 맴돌며 적절한 단어를 가늠해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애초의 질문을 잊어버렸다. 훨씬 더 다급한 질문이 생긴 탓이다. “지금 왜 우는 거지?” 바로 어린 생명체가 내게 던지는 요구의 언어, 울음 때문이었다. 태어난 지 100일도 되지 않아 우리 집에 온 연약하고 겁 많은 동물은 내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뿐더러 진심 어린 애정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자 이내 밥을 달라고 보채고, 잠자리나 화장실이 불편하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매번 울음으로 뜻을 전하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그 요구에 부응해 돌봄을 수행하면서 나는 내 고양이가 배고플 때 내는 울음소리와 심심할 때 내는 울음소리의 미세한 차이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이 생명체의 안위와 행복이 너무나 중요해졌다. 종일 떨어져 있으면 계속 눈에 밟혔다.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걸 보기만 해도 내 배가 부르는 듯 기뻤고, 며칠간 아픈 녀석의 머리맡을 지킬 때는 차라리 대신 아팠으면 했다.

차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엄마의 마음’이 아니면 뭘까? 핵심은 ‘엄마’가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내가 이 작은 털북숭이의 두 번째 엄마라는 사실을 별 뜻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별 뜻 없는 호칭으로 스스로를 불러오면서, 가족공동체라는 관계의 확장된 의미가 내 안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캣맘과 캣대디들은 가까이 있는 생명이 굶지 않고 춥지 않기를, 자기 몫의 삶을 건강히 살아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고양이를 돌본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본 동물의 위급한 수술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기도 한다. 상황과 이름은 달라도 돌봄의 마음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가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너무 일찍 모양과 형태를 규정해버린, 사랑이라는 허술한 단어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 시사인 반려인의 오후연재, 2022년 7월, 774호